
얼마 전 사퇴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당시 취재하는 기자들을 "후배"라고 부르던 모습이 기억난다. 유명 일간지의 주필까지 지낸 사람이 까마득히 어린 기자들을 후배라고 부르니 세대차로 인한 거리감도 줄고 오히려 아래 사람을 배려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도 한다. 그럼에도 굳이 사소한(?) 호칭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른바 관피아-해피아-철피아와 같은 한국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가 그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일을 하고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사실 '자연인'이라기보단 '역할인'(role-player)으로 상호작용한다. 자녀에게는 부모의 역할을 하고, 친구를 만날 때는 친구의 역할을 수행하며, 직장에서는 직업인의 역할을, 시장에서는 판매자와 구매자, 혹은 경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역할에 기반한 상호작용은 하나의 사회적 맥락에 대응하는 '주된' 역할이 존재한다는 암묵적 규칙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규칙의 위반은 행위자들에게 심각한 혼란을 초래한다. 병원에서 환자처럼 행동하는 의사(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말단 직원처럼 행동하는 사장, 집과 직장을 혼동해서 상사의 지시는 무시하고 부모 말만 따르는 신입사원, 사장처럼 구는 직장 동료, 혹은 부모처럼 잔소리를 늘어놓고 간섭하는 친구를 상상해보라.
그렇다면 역할의 혼란은 왜 일어나는가? 역할은 그것이 수행되는 무대에 의해 정의되는데, 불분명한 무대의 경계가 역할의 혼란을 초래하는 주된 원인이다. 문 후보자의 '후배' 호칭은 총리후보자로서 취재기자를 만나는 사회적 무대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그 자리는 언론계 선배와 후배가 만나는 사적 무대가 아니라 공적 역할 수행자들이 만나는 무대임을 잊은 것이다. 물론 문 후보자의 경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독립적 입법기관들의 모임인 국회에서 여당 실세 '형님' 국회의원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아우' 국회의원의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후배 법조인이 검찰총장에 임명되면 선배들이 일괄적으로 물러나는 광경은 심지어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한다. 누구도 검찰에서의 역할 수행에 왜 사법연수원 기수가 관련되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시야를 확대하면 사회 모든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특정 학교 출신들이 이른바 대세(?)를 형성한 기업, 자교 출신 교수임용 비율이 과도하게 높은 대학, 특정지역 출신들이 힘을 발휘하는 관료사회,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청년세대는 공존하는 다수의 역할 기준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다.
공적 역할에 충실할 것인가. 충실한 후배이자 동생이 될 것인가. 물론 직장에서는 능력껏 일하고 퇴근 후 좋은 선배나 후배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하지만 어젯밤 술잔을 기울이며 선후배 간의 의리를 나누고 나서 오늘 회의에서 선배의 의견에 반대할 수 있을까? 소신을 따라 반대의견을 피력한 후배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사적 영역에서의 관계는 어느새 공적 역할관계를 대체한다. 겉으로 드러난 대리-과장-부장 등의 역할 표지는 드러나지 않는 사적 관계망 위의 부유물이 된다. 최근 육군에서 후임병을 괴롭히다 살해한 사건에서도 주범인 병장을 '형님'으로 모신 하사가 등장한다. 심지어는 역할구조가 가장 뚜렷한 군대에서도 '의리'는 맹위를 떨친다.
수평적 리더십과 소통이 세계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지나치게 수직적인 위계를 해체하고 자유롭게 커뮤니케이션하는 조직이나 국가가 앞서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수평적 소통은 무질서한 소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역할 정의와 수행을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나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주어진 역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위계에 민감한 사람만이 살아남고 역할을 중시하는 사람은 도태되는 환경은 아닌가? 의리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는 의리가 넘지 말아야 하는 선도 분명히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