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윤재관 국회의원 보좌관
내가 가정폭력 쉼터와 인연을 맺은 것은 딸아이 덕분이었다. 2년 전 동네 YWCA로 공부를 다니던 딸아이가 길에서 1만원짜리 지폐를 주웠다. 그것을 선생님께 내밀며 좋은 일에 쓰고 싶다고 말했고 기특하게 여긴 선생님은 '쉼터'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그곳 아이들에게 빵을 사주자고 하셨다. 공개되면 안 되는 곳이라 아이는 자기가 고른 빵을 선생님을 통해 그곳에 전달했다. 이 사실을 한참 뒤에 알게 된 나는 아빠로서 뭔가 보탬이 되고 싶어 후원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박현숙 가정폭력 쉼터(꿈이있는집) 센터장님이 내게 이런 얘기를 털어놨다. "저희 쉼터는 사회복지시설이라 법적으로 전기세를 감면받을 수 있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법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이용을 할 수 없어요."
사연은 이렇다. 쉼터로 쓰는 아파트에는 어른과 아이 9명이 살고 외부침입에 대비해 상근 실무자 2명이 교대로 24시간 함께 지낸다. 가정은 누진제를 적용받기 때문에 여러 명이 생활하는 이곳에 부과되는 전기료는 한 달에 30만원이 넘는다. 그래서 사회복지시설이 운영하는 가정폭력 쉼터는 관련법에 따라 전기료 20% 감면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혜택을 받지 못하는 데는 안타까운 속사정이 있었다. 한국전력은 아파트 전기료 부과·징수계약을 가구별로 하지 않고 아파트 전체와 한다. 그래서 쉼터가 아파트에 입주한 경우 전기료 감면신청을 관리사무소를 통해서만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쉼터의 위치가 노출되고 같은 아파트 거주자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져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쉼터가 전기료 감면신청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머금고 비싼 전기료를 낼 수밖에 없었다.
"개별 신청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수도 없이 한전에 요구했죠. 시청, 여성가족부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안 된다는 말만 하는지 저희도 지쳤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직접 한전과 대화를 시도했다. "혜택을 볼 수도 없는데 감면제도가 있으면 뭐합니까." 늦은 봄에 시작한 나의 설득은 여름이 다 지나가는 데도 통하지 않았다. 국회에서 일하는 나도 이런데 일반인들이 관을 상대할 때는 얼마나 막막하고 답답할지 새삼 실감하게 됐다.
독자들의 PICK!
가정폭력 문제를 담당하는 여성가족부에 제도 개선을 한전에 강력히 요청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국회에 있는 산업위원회 보좌관들, 여성가족위 보좌관들을 모두 만나서 자료를 전달하며 문제를 알렸다.
국회에서는 법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 정부기관의 관리·감독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부기관이 운용하는 제도를 바꾸라고 요구할 수 있다. 국정감사를 앞두고는 관련 상임위의 여러 의원실에서 이 문제를 다루겠다고 했다. 한전을 담당하는 산업자원위원회 위원장실에서도 공감하고 직접 한전 측에 제도개선을 요구했다.
그해 11월 드디어 한전이 움직였다. 한전은 쉼터 측이 일단 전기료를 정상적으로 납부한 다음 관리사무소를 통하지 않고 돌려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했다. 쉼터를 노출하지 않으면서 제도혜택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십 명의 사람을 만나며 5개월 동안 노력해서 해결된 일이다. 안양YWCA 쉼터는 1년에 수백만 원의 비용을 절약할 수 있게 됐다. 그뿐 아니다. 제도가 개선되면서 전국의 모든 쉼터가 혜택을 받게 됐다.
안양YWCA 담당자분들은 자신들로 인해 다른 60여개 쉼터가 모두 혜택을 받았다는 데 더 큰 기쁨을 느꼈다. "정치가 중요하다는 생각, 이번에 처음 해봤어요." 쉼터 관계자들이 해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