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ze] 차은상은 왜 제국고를 떠나지 않았을까

[매거진 ize] 차은상은 왜 제국고를 떠나지 않았을까

김지현 칼럼니스트
2013.12.11 14:44

SBS < 상속자들 >의 차은상(박신혜)에게는 아무런 욕망이 없다. 먹고살 만큼 고정적으로 월급 받으며 살고 싶다는 그녀의 장래희망은 욕망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것이다. 드라마 초반에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받아줄 미국의 언니에게 거부당하자 다른 대안 없이 원래의 삶으로 돌아온다. 불법체류자가 되어 그곳에서 산다 해도 한국에서의 삶을 복제한 정도의 수준일 테니.

리얼리티의 측면에서 보자면 은상의 행동이 틀린 것은 아니다. 남의 집 메이드룸에 얹혀살고, 장애가 있는 엄마와 패키지로 입주 가사 도우미 취급을 받으며, 알바 백 개를 뛰면서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꿈인 처지에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은상은 사건을 만들지도, 자발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지도,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도 않는다. 오직 자기방어와 리액션만 하는 것은 그녀의 삶이 낳은 결과물일 것이다. 그러나 은상은 자신의 삶에 대한 방어마저 소극적이고, 점점 더 자신의 한계를 단단하게 만들어 그 안에 숨기만 한다. 애초에 제국고, 안 가도 됐다. 갔더라도 싫으면 안 다니겠다고 하면 된다. 일하는 카페에 와서 제국고 학생들이 개나 소나 돈 자랑하며 굴욕감을 준다면 그 일을 안 하면 된다. 회장님이 지금 당장 가고 싶은 나라로 떠나든지 보름 후에 자기가 보내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할 때, 은상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두 가지만은 아니다. 커플 운동화를 사고 애틋해할 돈으로 고시원을 구해서 나가 살면 된다.

은상이 좀처럼 자기 욕망도,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사실 그녀가 다른 캐릭터들의 감정을 보여주기 위한 기능적인 오브제로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김탄(이민호)에게 지금 중요한 건 은상과 사랑을 하고 추억을 쌓는 것이 아니라, 서자라는 자기 신분과 무력감을 극복하고 아버지와 형에게 맞서 싸우며 성장하는 것이다. 그에게 은상은 사랑하는 상대라기보다 의지와 용기를 일으켜주는 촉매제이자 무기다. 은상은 김탄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김탄이나 자신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회장님’의 논리에 헌신하고 희생한다. 처음에 최영도(김우빈)는 김탄과의 싸움에 은상을 노골적으로 이용한다. 둘의 관계가 발전할수록 은상은 망나니 같은 말과 행동 속에서 언뜻언뜻 내비치는 영도의 외로움과 순정을 발견해준다. 미국에서 돈 들고 튄 언니 생각은 1초도 안 하는 은상인데 말이다. 그 와중에 보나(크리스탈)의 매력도 발견해주고, 유라헬(김지원)이 비즈니스인 척하면서 실은 김탄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도 스스로 보여주게 한다. 그러나 정작 그 안에, 은상의 진짜 삶은 보이지 않는다. 은상이 정말로 김탄을 사랑한다면, 그를 제국그룹 서자가 아니라 또래 남자애로 봤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안위를 걱정하고 희생하는 게 아니라 그 애로 인해 즐겁고 놀라고 짜증 나고 삐치고 처음 겪는 자기의 감정을 음미할 줄도 아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은상이 자신을 둘러싼 갑갑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다. 자신의 한계를 규정짓는 ‘그들’의 논리가 아니라 자신만의 논리와 가치관을 가지면 된다. 얼마 안 되는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렬한 욕망을 동력 삼아 그 세계를 뚫고 나오면 된다. 아니면 차라리 적극적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면 된다. 하지만 은상은 신분 상승을 원하지도, 벗어나지도 않으면서 재벌 2세들의 사랑을 받는 캐릭터가 된다. 은상이 무색무취의 개성 없는 인간이기에 누구든 그 자리에 ‘나’를 대입할 수 있어 좋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재벌 2세가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 없는 대체일 뿐 감정이입이 아니다. 멋진 남주인공에 둘러싸인 여주인공이 공감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고, 그녀만의 독창적인 선택과 행동을 할 때, 우리는 비로소 현실에서는 꾸어보지 못한 꿈을 꿀 수 있다. 그 기쁨이 주는 동력이야말로 드라마를 보기까지 일주일을 설레며 살아갈 수 있는 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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