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에 대한 평가를 외모로 따지던 때가 있었다. 어쨌든 보여지는 직업이기에 "잘생기고 키 크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톱배우로 꼽히는 강동원, 조인성, 공유, 현빈 등만 해도 미소 한방이만 여심을 무장해제 시키는 '끝내주는' 미남들이다. 그만큼 배우를 평가하는 데 있어 외모는 큰 자산이다. 허나 이 배우들은 단지 외모에만 기대어 톱스타가 된 건 아니다. 영화 '늑대의 유혹'에서 우산 아래 드러낸 꽃미모로 극장을 탄성으로 메웠던 강동원은 언제 씻은 걸까 싶은 꾀죄죄한 얼굴로 좀비와 맞서 싸우는 변화(영화 '반도')를 보여줬고, 영화 '클래식'에서 외투 하나로 손예진과 빗속을 뛰던 조인성의 로맨틱한 얼굴은 안시성을 지키는 더벅머리의 우람한 장군(영화 '안시성')으로 거듭났다.
강동원이나 조인성의 데뷔 초작은 확실히 잘생긴 얼굴에 초점을 맞춘 미남 역할이 많았다. 앞에서 언급한 작품뿐 아니라 절정의 꽃미모를 발산하던 20~30대 시절 다양한 종류의 미남을 연기하며 대중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30대 후반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두 배우는 멋진 역할보다 좋은 작품과 인상적인 캐릭터에 중점을 뒀다. 아직 이들과 같은 톱으로 불리기에는 애매하나 비슷한 행보로 입지를 잘 구축하고 있는 배우가 있다. 바로 윤박이다.
윤박은 훤칠한 키(182cm)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미남이다. 백옥 같은 피부와 동양의 미가 느껴지는 눈매는 차별화된 매력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누가 봐도 잘생긴 윤박은 데뷔작인 MBC 에브리원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에서 젊고 매력적인 차세대 한류 스타를 연기했다. 이후 작품에서도 그는 설레는 눈웃음을 지닌 부드럽거나 또는 너무 잘나서 차가워 보이는 냉미남들을 연기하며 안방극장에 천천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독특하게도 그가 망가짐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건 드라마가 아닌 예능에서다. 2019년 출연한 SBS 예능 '정글의 법칙'에서 선미의 '24시간이 모자라' 댄스를 춰보이는 엉뚱함과 함께 돌연 다리 찢기를 하는 독특한 행동으로 시청자들에게 유쾌한 웃음을 선사했다. 이렇게나 엉뚱 발랄함을 품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배역들을 소화했을까의문이 들 정도로 놀라웠다.

그리곤 또 다시 tvN '써치'와 같은 작품에서 살기의 눈빛을 지닌 냉소적 역할로 반전을 선사하더니, 지난 24일 종영한 tvN '너는 나의 봄'에선 이중성을 품은 1인 2역 연기로 다시 한번 틀을 깨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본캐와 거리가 상당한 이 배우의 내면엔 도대체 어떤 것들이 자리해 있는지 무수한 궁금증까지 생겼을 정도다. '너는 나의 봄'은 저마다의 일곱 살을 가슴에 품은 채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살인사건이 일어난 건물에 모여 살게 되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힐링 로맨스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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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박은 '너는 나의 봄'에서 최정민과 이안 체이스라는 쌍둥이 형제를 연기했다. 이름도 없이 고아원에 버려져 미국으로 입양된 이안 체이스와, 버려지진 않았으나 버려진 것만큼이나 삶이 불행했던 채준. 이 파란만장한 서사가 말해주듯 윤박은 힐링 로맨스물에서 가장 어두운 모습으로 자리했던 요주의 인물이다. 사랑 앞에 완전무결했던 채준의 해맑은 얼굴과 냉소 밖에 남지 않은 소시오패스 이안 체이스의 상반된 두 얼굴을 윤박은 잘 소화해냈다.
"둘이 너무 다른 인물이라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설레었고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1인 2역에 대한 부담감은 크지 않았어요. 부담감이 있던 건 서현진, 김동욱 두 연기 잘 하는 선배 사이에서 밸런스를 맞출 수 있을까에 대한 것들이었죠. 1인 2역이라고는 하지만 채준이 초반에 퇴장하고 체이스가 이어가는 거라 털어내고 다르게 몰입할 수 있어서 크게 부담은 없던 것 같아요. 채준의 경우는 강다정에 대한 마음이 명확했기 때문에 오히려 연기하기가 괜찮았어요. 이안은 좀 애매했죠. 의뭉스러운 캐릭터였고 촬영했을 때 대본이 다 나온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치우친 방향으로 연기해버리면 돌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여지를 둬가며 연기했어요. 그 여지를 얼만큼 둘지에 대한 고민이 좀 있었지만 한 드라마에서 두 역할을 해냈다는 설렘이 컸어요."
'너는 나의 봄'은 힐링 로맨스를 표방하지만 살인 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한 전개가 스릴러를 보는 것 같다는 평가가 많았다. 이러한 스릴러의 중심엔 윤박이 맡은 두 배역이 있었고, 이들로 인해 발생한 살인 사건의 전모와 가슴 아픈 전사가 드러나면서 시청자들에게 먹먹함을 안겼다. 아버지를 살해한 그날부터 타인까지 이용해가며 복수하는 모습은 분명 잔혹했지만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설득력을 더했다.
"사실 스릴러 부분이 이렇게 집중될지 몰랐어요. 신의 목적에 맞게 최선을 다하려고 했고 간혹 체이스가 다정(서현진)과 만났을 때 로맨스 드라마이다 보니 조금의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제가 보기엔 체이스의 모습에서 채준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 것 같아요. 그렇다고 소시오패스인 체이스를 미화시키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밸런스를 맞춰가려고 노력했고, 그 외의 것들은 캐릭터 안에서 잘 해소시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봄 같은 작품에서 홀로 겨울의 느낌을 낸 윤박에 대한 시청자 반응은 역시나 호평으로 가득했다. 1인 2역에 대한 확연한 변주는 물론이고, 각 캐릭터에서 비춰지는 농도 짙은 내면 연기는 화면을 뚫고 전해질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시청자들의 좋은 반응을 지켜보며 윤박은 자신 역시 "칭찬을 들을 수 있는 배우란 걸 알았다"는 겸손하면서도 의외의 말을 꺼내놓았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나도 이렇게 연기를 하다보면 시청자분들에게 좋은 칭찬을 들을 때도 있구나'라는 걸 알게 됐어요. 사실 전 스스로가 연기 잘 하는 배우라고 생각 안해요. 그렇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발전하고 있다고는 생각해요. 아직 잘하는 배우라고는 생각하진 않아요. 사실 제가 자신감이 없기도 해요. 연기할 때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자신감인데 그런 것들을 채우려고 요즘 칭찬을 잘 받아들이려는 습관을 들이고 있어요. 해가 갈수록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기분이 들긴 해요."
스물 다섯의 나이로 데뷔했던 윤박은 올해로 서른 다섯이 됐다. 데뷔 10주년이다. 2012년부터 2021년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는 한해도 공백없이 빼곡하게 채워져있다. 스무살의 이른 나이에 군대를 다녀온 덕도 있지만, 쉬지 않고 연기할 동력을 갖춘 화면 안에서 힘을 갖는 배우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10년 간 서투르고 속상한 점도 많았고 '왜 이것밖에 못하지?'라는 생각도 많았어요. 지나고 보니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건 과거의 저였던 것 같아요. 고마웠던 10년이에요. 앞으로도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다보면 10년 뒤에는 더 나은 배우가 돼 있지 않을까 해요. 윤박이라는 배우가 나오면 흔히 '믿고 보는 배우'라는 생각이 드실 만큼 계속 좋은 연기를 보여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