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등장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공감, 유대

메디컬 드라마는 오랫동안 검증된 장르였다. 응급실의 긴박함, 수술실의 긴장감, 환자의 생사를 둘러싼 갈등은 언제나 강력한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그 중심에는 늘 영웅이 있었다. 위기의 순간 누구보다 냉철한 판단을 내리고,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마저 뒤집으며 생명을 구해내는 의사. 시청자는 그런 의사들에게 박수를 보냈고, 드라마는 그들의 헌신과 사명감을 조명해왔다.
지난 8일 첫 방송을 시작한 ENA 월화드라마 ‘닥터 섬보이’(극본 김지수, 연출 이명우, 원작 카카오페이지 ‘존버닥터’ 작가 김태풍) 역시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다. 하지만 8회까지 공개된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이 작품은 의사가 직업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일 뿐, 익숙한 메디컬 드라마의 문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금방 드러난다. 지금껏 우리에게 익숙한 드라마 속 의사란 대게 영웅이었다. 하지만 ‘닥터 섬보이’는 의사를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저 낯선 공간에 던져진 청춘일 뿐이다.

주인공 도지의(이재욱)는 최첨단 장비가 갖춰진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도 아니고, 의사로서의 야망을 품고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의사는 더더욱 아니다. 까칠하면서도 섬세하고 조금은 서툰 그는 바다와 섬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음에도 모두가 기피하는 섬 편동도로 발령받은 공중보건의사다. 극 중 편동도는 열악한 시설에 비협조적인 주민들로 악명 높은 곳이었기에, 그에게 편동도란 그저 근무 기간 1년만을 무사히 버텨내고 떠날 장소일 뿐이다.
이런 설정부터가 기존 메디컬 드라마와 다른 결을 드러낸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의사는 스스로 선택한 길 위에서 자신의 신념을 증명해낸다. 반면 도지의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똘똘 뭉쳐있는 공동체 안에 던져진다. 그런 그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과제 역시 어려운 수술이나 의학적 난제가 아닌, 섬 주민이라는 낯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신뢰를 얻는 일이다.

첫 화에서 심근경색이 의심되는 이장 박춘식(우현)을 살려내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반적인 메디컬 드라마였다면 의사 도지의의 활약만을 강조하는 순간으로 소비됐을 테지만, 도지의는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안다”며 의학적 판단을 따르지 않는 박춘식과 부딪힌다. 결국 박춘식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도지의는 황신혜(주인영)를 비롯한 보건 지소 식구들의 도움으로 생명이 위독해진 박춘식을 구한다. 이후 목숨을 건진 박춘식은 도지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아”가 입버릇이던 마을 사람들과 맞서 그의 편을 들어준다. 도지의를 그저 떠날 사람 정도로 여기던 마을 사람들도 차츰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의료 행위가 영웅 서사의 증거가 아니라 관계를 연결하는 계기로 작용한 셈이다. 편동도의 주민들 역시 이 드라마에서는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공보의들을 의사가 아닌 인생 후배로서 가르치고 돌보는 또 다른 주인공들이다.
6회에서 그 특징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육하리(신예은)의 할머니 오미자(길해연)는 연명 치료를 원하지 않는 자신의 속내를 도지의에게 털어놓는다. 많은 메디컬 드라마가 환자를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이 작품은 환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문제를 이야기한다. 도지의는 기적 같은 치료법을 찾아내는 대신 오미자의 진심을 이해하려 한다. 그 갈등은 의료적 판단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의사로서 환자를 살릴 것인가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과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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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의와 육하리가 만들어가는 사랑 이야기 또한 익숙한 로맨스 드라마들과는 조금 다르게 전개된다. 아무것도 모른 채 끌림을 느낀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엮인 짝이거나 서로를 구원하는 사랑의 주인공은 아니다.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오해를 풀고 서로를 조금씩 치유해가는 관계에 가깝다. 그래서 둘의 로맨스는 설렘보다 위로를 먼저 건넨다.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를 지켜보던 시청자가 느끼는 감정도 짜릿함 보다는 안도에 더 가깝다.
결국 이 드라마는 의사를 완벽한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두려움을 느끼고 상처도 있으며 때로는 실수를 하고 흔들린다. 환자를 귀찮아하거나 불편해하기도, 자신의 처치 후 병세가 심각해진 환자 앞에서는 혹시 저 때문은 아닌가 걱정하면서도 그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그간 드라마 속 의사가 주로 ‘신’의 자리에 있었다면, 도지의는 차라리 ‘직장인’에 가깝다. 그 거리감의 차이가 시청자를 그에게 한 걸음 더 가깝게 데려간다. 그리고 그 빈틈이야말로 ‘닥터 섬보이‘가 한 사람의 청춘을 먼저 보여주는 지점이다.

‘닥터 섬보이’는 메디컬 드라마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실상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이야기라기보다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사람을 배우는 청춘의 이야기, 서로가 서로를 자라게 하는 공동체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감동은 수술실이나 응급실이 아니라 항구 앞에서, 골목길에서 만들어진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는 곳에서 이야기가 피어난다. 의사가 주인공이지만 영웅은 아니라는 점에서 ‘닥터 섬보이’는 익숙한 장르 안에서도 의외의 따뜻함을 길어 올린다.
조이음(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