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가족의 무게, ‘경주기행’

논리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가족의 무게, ‘경주기행’

정수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6.08.24 11:28
구글 선호 매체 등록 구글에서 머니투데이 추가하기

이정은과 공효진 박소담 이연과 떠나는 죽이는 여행

영화 경주기행은 막내딸을 죽인 살인범을 납치해 복수하려는 엄마 옥실과 세 딸의 여정을 담은 로드무비이자 블랙코미디다.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 이연이 주연을 맡아 가족 안에서 각기 다른 위치에 따른 미묘한 심리와 관계성을 포착했다. 김미조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가족의 상실과 사적 제재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가족의 의미를 되짚게 했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엄마와 딸 셋의 가족여행. 언뜻 굉장히 화목한 느낌이 들지만, 가족여행을 떠나본 자들은 안다. 그 여정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심지어 영화 ‘경주기행’의 여행은 가족의 화목을 도모하는 여행이 아니라 자칫 가족이 결딴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여행이다. 이 여행에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 이연 그리고 변요한이 함께했다.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이름값에 우선 동행하고 싶은 마음은 든다.

‘경주기행’은 기행(紀行)이란 제목처럼 큰 틀에선 가족의 여정을 좇는 로드무비이지만, 가족이 뭉쳐 막내딸의 살인범을 죽이려는 기괴한 기행(奇行)을 담은 복수극이고, 그런 가운데 가족의 의미를 뜨겁게 되짚는 가족극이다. 제목의 경주 또한 수학여행의 성지로 유명한 천년고도 경주(慶州)를 배경으로 하면서, 동시에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된 막내딸의 이름을 뜻한다. 가족과 사적 제재라는 무거운 주제를 아우르지만, 그 외피를 우당탕탕 소동극의 블랙코미디로 담아내는 등 복합적인 장르가 주는 리듬감에 몸을 싣고 메시지가 담은 중의적 의미를 여러모로 곱씹어야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물씬 풍긴다. 곧 서 버릴 것 같은 낡은 봉고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네 모녀가 있다. 앞에는 ‘FAMILY’, 뒤에는 각자 ‘엄마’ ‘첫째’ 둘째’ ‘셋째’라고 새겨진 단체 티셔츠를 입었지만, 웃음꽃은커녕 심드렁한 듯 하지만 어딘가 비장한 표정들이 평범한 가족여행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그렇다. 이 가족, 엄마 옥실(이정은)과 첫째 장주(공효진), 둘째 영주(박소담), 셋째 동주(이연)는 막내딸 경주를 죽인 살인범을 납치해 ‘죽이러’ 가는 알리바이 여행을 떠난 참이다. 그런데, 아무리 복수심에 불타는 유가족이라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적 복수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쉬울까? 아니나 다를까, 영주가 완벽에 완벽을 기해 짰던 알리바이 여행은 결코 순탄하지 않게 흘러간다.

딸을 잃고 마음이 무너져 내린 엄마 옥실의 깊고 끔찍한 고통이 이 복수극의 원천이지만, 그 여행에 동참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똑같을 수 없다는 것도 영화를 곱씹게 되는 이유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가족의 상실은 뼈아픈 고통이지만, 그 고통이 모두에게 같은 무게와 의미일 순 없다. 엄마를 위해 복수극에 동참하지만 남편과 어린 딸이 있는 첫째 장주의 상황이 옥실과 같을 수 있을까?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짰지만 이 복수극의 무모함을 너무나 잘 아는 둘째 영주의 마음도 복잡하고, 막내와 얼마 나이 차가 지지 않던 셋째 동주는 자신만의 죄책감으로 이미 속으로 곪아 있는 상태다. 관객들은 영화가 보여주는 소동극에 웃다가도 어느덧 이 가족의 각자 상황과 관계성에 자신을 대입해 보게 된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성 관객이 ‘경주기행’에 좀 더 몰입과 공감을 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네 딸 중 막내로 자랐다는 감독의 경험이 진하게 배어 있는 모녀의 이야기인지라 더욱 그렇다. 첫째이자 장녀로 자란 나는 자연스레 첫째 장주에게 시선이 쏠렸고 몇몇 장주의 대사에 울컥했지만, 아마 내 여동생들이 영화를 보면 영주나 동주에 이입할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가족 안에서 각기 다른 포지션에 따라 생기는 미묘한 심리와 관계성을 영화는 잘 포착해낸다. 세상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또 세상 누구보다 날카롭게 나에게 상처를 안기는 가족에 대한 묘사는 또 어떻고. “가족 일에 무슨 논리가 필요해”라면서도 “가족이랍시고” “진짜 상처 주”는 말을 서슴지 않는 이들의 관계를 보며 복잡다단한 내 가족을 떠올리는 관객이 한둘이 아닐 것이라 장담한다.

다만 가족극으로는 박수를 쳐주고 싶은데, 여러 장르를 넘나들 때마다 조금씩 덜컹거리는 느낌은 없지 않다. 포스터나 예고편만 보고 90년대 ‘조용한 가족’ 같은 결의 블랙 코미디를 기대했다면 무거울 수밖에 없는 서사와 메시지에 당혹할 수도 있다.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배우들의 열연이 그 당혹감을 메우긴 한다. ‘기생충’ ‘동백꽃 필 무렵’ ‘우리들의 블루스’ ‘좀비딸’ 등 영화와 드라마를 종횡무진하는 이정은의 ‘하드캐리’는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 이미 ‘동백꽃 필 무렵’에서 공효진과 모녀 케미를 보이며 21세기 국민 엄마 대열에 선 이정은의 처절한 모성 연기는 관객들의 눈물을 훔칠 만하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공효진, 박소담, 이연의 천차만별 다른 자매 연기도 일품이다. 특히 ‘K-장녀’들의 심금을 울릴 공효진의 장녀 연기와 프로 레슬러 출신이라 액션 연기를 펼친 이연의 노고가 돋보인다. 모녀들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여성 캐릭터들도 인상적이다. 살인범 납치를 돕는 조필례 역의 남권아나 살인범을 쫓는 형사 역의 김정영 등 기존 상업영화에서 으레 남자가 맡던 역할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성 캐릭터가 맡은 부분이 의미심장하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향연에서 노 개런티로 특별출연한 변요한의 존재감도 빛난다. 장르 변주의 시그널 역할을 하는 변요한의 눈빛이 영화의 긴장감을 상승시키기 때문.

‘경주기행’은 첫 장편영화 ‘갈매기’로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대상, 제22회 여성영화인상 각본상을 수상한 김미조 감독이 연출했다. 러닝타임 111분, 15세 이상 관람가. 3시간 가까운 할리우드 대작들이 1, 2위를 다투고 있는 극장가지만, 엄마와 딸을 비롯한 가족들이 함께 관람하기엔 ‘경주기행’이 더 편안한 선택일 수 있겠다. 현실의 앙금과 상처를 딛고 앞으로 한 발 나아가고자 하는 가족들이라면 더더욱. 8월 26일 개봉.

정수진(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