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모험자본에도 비축유는 필요하다

[기고] 모험자본에도 비축유는 필요하다

오지열 고려대 경영학 교수
2026.04.09 14:00
오지열 고려대 경영학 교수
오지열 고려대 경영학 교수

최근 벤처투자 미소진 자금을 놓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정책자금이 마치 곳간에서 잠자는 듯 보이지만 이는 벤처 자본이 가진 전략적 시차와 인내라는 본연의 기능을 간과한 시각이다. 단순히 남은 돈이 아닌, 미래 혁신을 위해 준비된 '전략적 투자여력'으로 봐야 한다.

벤처펀드는 결성 즉시 소진해야 하는 소모성 예산이 아니다. 보통 3~5년에 걸쳐 투자가 집행되며 시장의 온도에 따라 속도를 조절하는 게 운용사의 핵심 역량이다. 특히 유망 기업이 성장 단계마다 겪는 자금난을 해결해 줄 후속 투자 여력을 확보하는 게 필수 전략이다. 초기에 모든 자금을 소진한다면 정작 기업이 고금리와 경기둔화 속 '데스밸리'를 지날 때 필요한 연료를 공급할 수 없다.

올해 IPO를 앞둔 스페이스X는 장기 인내자본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회사는 2002년 일론 머스크의 1억달러 규모 최초 투자 이후 지난 20여년간 31번의 펀딩 라운드를 거쳤다. 팰컨1은 첫 세 번의 발사를 실패했으나 기술이 성숙해진 2015년에 이르자 회사는 10억달러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 기간 장기 인내자본이 고비마다 함께 하지 않았다면 회사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웠을 것이다.

벤처투자 시장의 투자여력은 에너지 안보를 위한 전략적 비축유와 같다.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려 유가가 요동칠 때 국가가 비축해 둔 원유가 경제 마비를 막는다. 평시에 탱크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자원 낭비가 아니다. 벤처투자 여력 역시 불확실한 시장 상황 속에서 혁신의 동력이 꺼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자본 비축유'인 셈이다. 비축유를 믿고 사람들이 주유소에서 긴 시간 줄을 서지 않고 일상생활을 하듯, 투자여력의 존재 또한 혁신기업들이 본연의 기업활동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투자 여력은 '소진율'에 집중할 게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축적·확대해야 할 자산으로 봐야 한다. 호황기에 조성된 자본이 불황기에 전략적으로 투입될 때 벤처 생태계는 경기와 무관하게 일정 수준의 혁신을 유지할 수 있다. 오히려 단기 집행률에 매몰되면 벤처자본이 '연말 몰아쓰기'나 단기 회수가 쉬운 투자에 몰리고 스타트업 역시 투자를 받기 위해 단기 실적에 매달리게 된다. AI반도체 등 중장기 투자가 필요한 딥테크 영역은 당연히 후순위로 밀린다.

과거의 위기들은 비축된 모험자본의 가치를 증명해 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팬데믹 당시 전략적으로 비축됐던 자본들이 적기에 투입되면서 오늘날의 유니콘 기업들을 탄생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이제 "왜 자본이 고여 있는가"가 아니라 "이 소중한 자산이 어떤 원칙에 따라 혁신의 현장으로 흘러가게 할 것인가"를 봐야 한다. 전략적 투자여력은 실패 지표가 아니라 우리 경제의 미래를 지탱할 잠재력의 지표다. 투자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대하면서 운용의 질을 높여 지능적 연료 공급이 일어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할 때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