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무슨일이?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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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0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도쿄에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을 만나 양국 국교정상화에 대한 비밀논의를 갖는다. 이들은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에 합의하고 일본이 한국에게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 이상'의 지원을 할 것을 약속한다. 1964년 초부터 박정희 정권은 그동안 비밀리 추진하던 한·일 교섭을 서둘러 진행하기 시작한다. 그 해 2월 정부와 여당은 3월 내로 대일(對日) 교섭의 기본 방침을 밀고 나가겠다는 결정을 발표한다. 당시 정부는 일본의 경제협력을 통한 군사정권의 경제적 기반확충과 미국의 압력 등으로 인한 대일관계 정상화가 시급한 탓에 협상에 저자세로 임했다. 이에 대학생들이 '밀실에서 이뤄지는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기 시작한다. 사회 각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대일협상은 계속됐고, 급기야 52년 전 오늘(1964년 6월 3일) 일반시민들까지 시위에 대거 가세하며 6·3 항쟁이 시작된다
1939년 7월4일, 미국 뉴욕에 위치한 양키스타디움에선 한 선수의 은퇴식이 열렸다. 그 선수를 위해 6만1800여명의 뉴욕 양키스팬과 미국 메이저리그(MLB)관계자가 참석했다. 은퇴식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선수에게 선물을 전달했지만, 그는 선물을 땅에 내려놔야만 했다. 은퇴식 한달 전, 근위축성측상경화증(ALS)과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그로선 선물을 들 수 있는 팔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ALS는 대뇌와 척수의 운동신경 세포가 파괴돼 근육이 점점 힘을 잃어가다 결국 호흡장애와 음식물 섭취 불가능 등의 증상으로 사망하게 되는 병이다. 은퇴를 하면서 뉴욕을 눈물바다로 만들게 한 이 선수는 루트비히 하인리히 게릭, 바로 '루 게릭'이다. 1903년 가난한 독일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923년 MLB 뉴욕 양키스에 입단해 3년차에 팀의 주전으로 자리잡는다. 루 게릭은 주전이 된 해부터 14년간 213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우면서 '철마'(The Iron Horse
만일 내가 사흘 동안만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엔 나를 가르쳐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의 얼굴을 보고, 산과 들로 나가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트는 모습을 볼 것이며,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본다. 셋째 날은 큰 길로 나가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다. 점심 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즐기고, 저녁엔 황홀한 네온사인을 보며 집에 돌아와 마지막으로 사흘간 눈을 뜨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겠다.(헬렌 켈러의 저서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장애를 이겨내는 극복 의지, 긍정적인 삶의 태도, 사회적 소외자에 대한 배려를 주제로 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다. 바로 헬렌 켈러다. 1880년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태어난 그는 생후 19개월 때 성홍열과 뇌막염에 걸려 위와 뇌에서 급성출혈이 있었다. 이로 인해 평생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귀는 들리지 않고, 눈은 보이지
1996년 5월 31일. 국제축구연맹(FIFA)은 이날 2002년 월드컵 개최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수년 전부터 아시아권 첫 월드컵 개최를 추진해온 일본은 개최지 선정을 자신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FIFA의 독재자'로 불리던 주앙 아벨란제 FIFA 회장도 일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그에 반해 후발주자로 개최경쟁에 뛰어든 대한민국은 선정기간 내내 다소 열세를 보였다. 하지만 22년간 FIFA를 주무르던 아벨란제를 견제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우리나라 지지를 선언하면서 개최지 경쟁 양상이 백중세로 흘렀다. 결국 FIFA는 스위스 취리히 FIFA본부에서 집행위원회를 열고 2002년 월드컵을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공동개최하기로 정했다. 두 나라가 공동개최로 개최지가 선정된 것도 월드컵 역사상 처음이었고 아시아권에서 개최가 확정된 것도 최초였다. 지구촌 최대의 축제이자 21세기 첫 월드컵 유치의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6년의 준비기간 뒤 14년 전 오늘(2002년 5월 31일
한국에 유관순이 있다면 프랑스엔 이 여성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졌던 백년 전쟁(1337~1453년) 마지막 시기에 등장한 프랑스 구국 소녀 잔 다르크다. 잔 다르크는 1412년 프랑스 동레미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이 된 어느날 그녀 앞에 천사장 미카엘이 나타나 "프랑스 왕을 구하고 오를레앙의 포위망을 풀도록 하라"는 계시를 듣고 전장에 나서게 됐다는게 역사 속 설명이다. 당시 프랑스는 백년 전쟁에서 영국군에 계속해서 밀리고 있었고 전쟁의 주 무대였던 프랑스 국민들은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왕세자의 허락을 받은 잔 다르크는 군대와 식량을 싣고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백마를 타고 선두에 선 잔 다르크는 흰 갑옷에 망토를 걸치고 손에는 깃발을 들어 병사들을 진두지휘했다. 영웅을 기다리던 프랑스 병사와 시민들은 치솟은 사기로 똘똘뭉쳐 싸웠다. 그녀는 프랑스 병사들에게 승리의 여신이자 최고의 전략가였다. 일부 귀족들은 잔 다르크의 무모한 전략을 반대할 때도
1972년 프랑스 파리의 국립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중년의 동양 여성이 한자로 된 서적을 뒤적거린다. 프랑스 땅을 밟고 난 후 이 여성은 줄곧 한문서적만 찾아 다녔다.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역사학과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게 된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그의 스승이 부탁한 '조선왕조의궤'를 찾는 것이다. 1955년 32살 나이에 프랑스 땅을 밟은 고(故) 박병선 박사는 맹목적으로 의궤를 찾아 헤맸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도서관 한 구석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을 발견한 것이다. 꼬박 17년 만이었다. 이 책의 이름은 '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은 고려 우왕 때인 1377년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이다. 원래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심체요절'로 백운화상이 저술한 책을 그의 제자 석찬과 달담이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했다. 책의 주요 내용은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
2년 전 오늘인 2014년 5월28일 오전 10시54분 지하철 3호석 도곡역으로 진입하던 열차 안에서 자욱한 연기가 퍼져 나갔다. 이 열차 네 번째 칸에 타고 있던 조모씨(당시 71세)가 노약자석에 시너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묻지마 방화사건'이었다. 이날 해당 열차엔 370명의 승객이 타고 있어 '제2의 대구지하철참사'가 될 뻔했다. 다행히 열차가 역내로 진입한 순간 화재가 발생해 승객들이 대피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열차에 타고 있던 한 역무원의 신속한 대응이 빛난 순간이었다. 그는 재빨리 소화기를 꺼내 불이 번지는 걸 막고 승객들에게 비상벨을 눌러 화재사실을 기관사에게 신고하라고 했다. 그 결과 역무원들이 곧바로 소화기를 들고 출동했고, 화재가 발생한 지 6분 만에 진압할 수 있었다. 승객 370명은 모두 무사히 대피했다. 도주했던 조씨는 피해자인 것처럼 속여 구급차에 올랐다가 정체가 드러났다. 인근 화상전문병원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그가 신원을 밝히길 꺼려
'기울어진 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은 바로 옆 피사 대성당의 예배시간을 알려주는 종루로 지어졌다. 1174년 착공 당시만해도 현재 높이(58.36cm)의 2배인 110m로 계획됐지만 3층을 지으면서 탑이 점점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한쪽 땅이 모래와 진흙층으로 이뤄져 반대편에 비해 너무 물렁했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초창기에는 탑을 증기 기관차에 연결해 잡아당기거나 기울어진 쪽에 풍선을 매달아 수직을 맞추자고 하는 등 웃지 못할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사다리꼴 석재도 사용해 봤지만 탑이 기우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렇게 피사의 사탑은 1360년 8층짜리로 완공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탑은 1년에 몇 mm씩 계속 기울었다. 1930년대엔 베니토 무솔리니가 탑을 똑바로 일으켜 세울 것을 지시해 지반에 콘크리트를 부어도 보고 얼려 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사태는 더 악화됐다. 이후로는 손을 놓고 탑이 기우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
"그저 이 은전 한닢이 갖고 싶었습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국어 교과과정을 배운 30대 이상에게 이 문구는 참 익숙하다.국어 교과서는 대체로 학생들에게 '암기를 요구하는 따분한 책이다. 한 늙은 거지가 은전 한닢을 모으기 위해 살아왔던 6개월이란 시간을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 '은전한닢'은 수험생활에 지친 학생들에게 '숨통'을 틔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렇게 일상의 평범함을 하나의 서정적인 작품으로 탄생시킨 주인공은 바로 피천득 수필가다. 2007년 5월25일, 9년 전 오늘은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이 노환(97세)으로 세상을 떠난 날이다. 수필처럼 곱고 소박하게 살다 갔다는 평가를 받는 피천득 선생은 '시'와 같은 수필을 써내며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자리매김했다. 피천득은 1910년 5월29일 서울 종로구에서 태어났다. 당시 피천득의 부친은 종각에서 종로5가, 양재동 일대의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부호'였다. 하지만 집안의 부유함과는 별개로 피천득은 다소 우울한 유년시절
2000년대 초반 국내에선 해외 국적 취득을 목적으로 한 원정출산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한 달 체류비만 1000만~3000만 원 정도가 드는 원정출산에는 부유층뿐만 아니라 중산층도 가세해 매년 5000~7000명 가량의 산모들이 비행기에 올랐다. 만삭의 몸으로 비행기를 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들에게 원정출산은 투자였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출산을 하면 곧바로 시민권을 얻을 수 있어 해당 국가에서의 교육과 세제, 의료 혜택 등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만해도 이중국적을 가진 남자 아이는 만17세까지 하나의 국적을 선택하도록 했는데 대부분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훗날 병역 면제가 될 수 있었다. 당시 원정출산 산모들에 대한 경찰 조사에 따르면 이들 중 일부는 출국 전 태아의 성별을 감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연히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던 대다수의 국민들은 상대적 박탈감과 위화감을 느꼈다. 결국 국회는 외국에 일시 체류하면서 아이를 낳아 외국 시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유서 중 일부 2009년 5월23일 토요일 오전, 사람들은 여느 때와 같은 한가로운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오전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사인은 '두부 손상 및 골절'.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새벽 대통령 퇴임 후 자리잡은 고향 김해시 봉하마을 뒷산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통령이 '자살'을 선택한 것은 사상 유례 없는 일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날 오전 기자회견을 통해 그의 자살과 사망 소식을 공식 확인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이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로 강도 높은 검찰 수사를 받던 중이었던 터라 사안은 더욱 민감하게 다뤄졌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은 2008년 7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국제보건의료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인이 2003년 5월 유엔 산하 기구 수장으로 깜짝 선출됐다. 7차례의 표결을 거치는 접전 끝에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에 선출된 이종욱 박사는 그렇게 세계인의 건강과 보건을 책임지게 됐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고 우리가 바로 그 누군가입니다." 2003년 11월 WHO 대표단 세계회의에서 그가 한 말이다. 그의 말처럼 이 총장은 당선 후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말라리아 등 전염병과 에이즈 예방사업에 전력을 기울인다. 당시 한국인 최초로 연간 예산 22억달러, 직원 5000여명에 이르는 유엔 산하 최대 국제기구 수장에 취임한 이종욱 WHO 사무총장의 의료 외길은 대학시절부터였다. 대학 재학 시절 내내 경기 안양 나자로마을에서 한센병 환자를 진료하던 그는 이곳에서 가톨릭 신자로 봉사활동을 온 동갑내기 일본인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를 만나 결혼한다. 1981년엔 레이코 여사와 함께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인 미국령 사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