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무슨일이?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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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을 맞이한 조선인들은 조만간 온전한 주권국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의에 따라 열린 미국-소련 공동위원회가 1947년 8월 12일 완전 결렬되면서 한반도 내 통합정부 수립이 무산되고 말았다. 미국은 소련과의 협상 결렬 한달 뒤 유엔(UN·국제연합)총회에 한반도 문제를 정식 제기했다. UN은 △UN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 실시 후 정부수립 △선거 후 미·소 양군의 동시 철수 △감시협의체로 UN한국임시위원단(UN위원단) 설치 등 미국이 제안한 내용이 담긴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8개국 대표로 구성된 UN위원단이 1948년 1월 7일 입국했지만, 소련이 38선 이북에 대한 UN위원단의 방문을 거부하면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된다. 이에 UN은 소총회를 열어 '선거가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세울 것'을 결의했다. UN총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가 결정되자 이를 두고 남
1950년대 유럽과 미국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은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높이 틀어올려 쌓아올린 '올림머리' 혹은 '곱슬 파마'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올림머리는 머리카락 무게만 해도 상당했다.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성들은 매일 밤 머리카락을 돌돌 마는 '롤러 세트' 기구를 착용한 채 잠을 청해야했고, 미용실도 자주 가야만했다. 그러던 중 영국 런던에서 미용실을 연 남성 헤어디자이너가 1960년대부터 가위 하나로 여성들의 머리를 간편하고 특별한 모양낼 필요가 없을 만큼 제자리에 들어맞는 커트를 하기 시작한다. 단발머리인 '보브(bob) 커트'를 창시한 이 헤어디자이너는 바로 '비달 사순'이다. 그는 C·V자 형태의 짧은 머리와 기하학적인 모양의 머리로도 여성이 충분히 우아할 수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특히 그가 선보인 짧은 머리는 당시 막 태동하던 여성해방 운동과 함께 여성계를 열광시켰고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 BBC는 보브컷을 '1960년대의 혁명적인 헤어컷'이라고 평했다.
피자와 치킨을 주문하면 짝꿍처럼 쫓아오는 음료가 있다. 바로 '콜라'. 이 콜라가 실은 약국에서 두통을 없애는 시럽으로 개발됐다면 믿을 수 있을까. 미국 애틀렌타에 살던 존 펨버턴은 여러 가지 약제를 조합하는 것을 즐기던 약사였다. 어느 날 그는 두통을 경감시킬 응급제를 찾다가 코카의 잎, 콜라의 열매, 카페인 등을 주원료로 하는 캐러멜색의 향기로운 액체를 만들어냈다. 그는 이 혼합액에 탄산수를 더해 약국 손님들에게 맛을 보게 했다.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1886년 5월 8일, 펨버턴은 이 음료를 한 잔당 5센트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음료에 '코카콜라'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펨버턴의 경리 사원이었던 프랭크 로빈슨이었다. 로빈슨은 독특한 필체로 이름을 적어넣었다. 우리가 아는 그 코카콜라 로고로 1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함없이 쓰이고 있다. 코카콜라를 본격적으로 상품화한 사람은 아사 캔들러라는 사업가였다. 펨버턴은 캔들러에게 약 $2300에 코카콜라 원액 및 추출물에 관한 특허
6·25전쟁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1951년 당시 거제도에는 13만여명을 수용한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수용된 포로들은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와 송환을 희망하는 친공포로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했다. 갈등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민간인 억류자로 분류된 이들에 대한 미군의 송환분류심사였다. 민간인 억류자들은 대부분 남한 출신으로 인민군에 복무하다 붙잡힌 이들이었다. 미군은 그들에게 송환분류심사를 통해 원하는 곳으로의 망명을 허가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친공계 포로들은 '포로는 전쟁행위 종료 뒤 지체없이 석방돼 본국으로 송환돼야 한다'는 포로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정 제118조를 거론하며 미군의 송환분류 심사는 명백한 위반이라고 맞섰다. 이를 둘러싸고 수용소 내에선 크고 작은 폭동들이 일어났고 결국 1952년 5월7일 사건이 발생했다. 포로들의 피복과 식량 배급 등에 대한 면담을 하던 포로수용소 소장 도프란시스 도드 준장이 납치된 것이다. 포로들은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도드
"내 인생은 어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세계에 바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어린이들의 세계다." -마리아 몬테소리- 64년 전 오늘(1952년 5월 6일)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한 여성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그의 주름이 유독 깊은 이유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기구했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과 어린이들의 삶을 짊어지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을 앞두고 그가 살아왔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이 당시 여성들이 살아가는 대로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안주하길 거부했다. 이탈리아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의대에 입학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격리된 체 수업을 받는 등 차별은 있었지만 6년 만에 로마대학교 의과 대학을 졸업해 최초의 이탈리아 여의사가 됐다. 1896년 독일의 베를린에서 개최된 국제여성권리대회에 이탈리아의 특사로 파견되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임금 문제에 대해 연설을 했다. 당시 유럽의 남녀간 격차에 대해 문제의식을 던졌고 여성 교육현실
"잠옷으론 무엇을 입나요? 파자마 상하의? 가운?" "샤넬 넘버5 한 방울, 그리고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요."(생전 마릴린 먼로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답변) 미국 배우 마릴린먼로의 잠옷으로 유명한 샤넬 넘버5는 프랑스 의상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이 자신의 이름을 따 만든 명품 향수다. 장미와 재스민, 바이올렛 향기를 섞어 1921년 5월5일 출시한 이 향수는 향수 산업에 혁신을 일으켰다. 이때까지만해도 합성물질인 알데히드(휘발성 물질)는 업계에서 배척받는 물질이었는데 최초로 천연향유와 함께 다량의 알데히드를 사용해 강한 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향수 역사상 최초로 이름에 숫자가 들어간 경우이기도 하다. 샤넬이 향수 이름에 '넘버 5'라는 번호를 붙인 것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있다. 샤넬은 당시 유명한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에게 첫 향수 제작을 의뢰했고 1부터 5까지 숫자가 붙은 샘플과 20에서 24까지의 숫자가 붙은 샘플을 받았다. 이 샘플들 중 5번 샘플이 샤넬의 마음에 들
1980년대 초반 많은 기업은 시중은행의 문턱을 넘지 못해 '울며 겨자먹기'로 고액 사채를 썼다. 당시 수백억원의 자금으로 증시와 사채시장에서 활동하면서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불리던 장영자는 자금압박에 시달리는 회사에 솔깃할 법한 제안을 들고 접근한다. 장씨는 △차입한도 100억~200억원 △연리 22% △2년 거치 3년 상환이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대출조건을 내세웠다. 특히 그는 전 중앙정보부 차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남편 이철희(당시 59세)의 경력을 언급하면서 "특수자금이니 비밀을 지키라"는 말로 입단속을 시켰다. 그는 당시 최고권력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삼촌(이순자 여사의 삼촌)인 이규광(당시 광업진흥공사 사장)의 처제기도 했다. 이철희·장영자 부부는 이런 배경을 활용해 6개 기업에 대출을 해준다. 이들 부부는 기업들에 차입금의 2배에 해당하는 약속어음을 담보로 교부해달라고 요청한 뒤 이 어음을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현금화하거나 다른 회사 어음과 교환해 할인했다. 그들은
1993년 12월20일, 유엔(UN)총회에선 유네스코의 추천을 바탕으로 표현의 자유를 지원하기 위한 결정을 내린다. 유엔은 이날 총회에서 "많은 나라에서 정부의 억압으로 언론의 독립성이 위협받고 있으며 많은 언론인들이 진실을 밝히는 와중에 생명의 위협받고 있다"며 이같은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매년 5월3일을 '세계 언론 자유의 날'로 제정한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2004년~2013년까지 취재 과정에서 피살된 전 세계 언론인은 600명 이상이다. 이중 가해자가 처벌을 받은 경우는 전체의 10% 수준에 불과하다. 언론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요인으론 △독재정권의 언론탄압 △부당한 사법체계 △내전에 따른 정정불안 등이 꼽힌다. 지난해에만 71명의 언론인이 살해됐고 826명이 정부에 의해 체포됐다. 여기에 2000명 이상의 언론인들이 협박이나 공격을 받았다고 유엔은 밝혔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언론자유 순위는 올해 역대 최저순위를 기록했다. 국제 언론 감시단체 '국경 없는 기자회'(R
2011년 5월2일 미국 백악관은 알카에다 창립자이자 9·11 테러의 배후였던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됐다고 발표했다. 9·11 테러로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후 빈 라덴 사망까지 걸린 기간만 10년이었다. 빈 라덴 사살 작전은 치밀하고 은밀했다. '오퍼레이션 넵튠 스피어', 빈 라덴 사살 작전이라는 특명을 받은 미군은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멀지 않은 소도시 아보타바드로 이동했다. 헬리콥터에서 내린 미국 네이비실 소속 특수요원들은 3층짜리 대규모 주택으로 진입했다. 4~5m의 두꺼운 방호벽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이 고급저택이 빈 라덴의 은신처였다. 그동안 빈 라덴이 아프간 산악지역의 험한 동굴에서 지낼 것이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그는 보통 가옥보다 8배나 큰 대규모 주택에서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저택 인근에는 육군사관학교와 육군 2사단의 사단본부 등 파키스탄의 군사 시설이 있었다. 미로 같은 내부를 뚫고 들어간 미군은 저항하는 빈 라덴 측근 세력들
"기어서라도 가겠다." 산악인 박영석이 2005년 2월24일 북극점 정복을 향해 고국을 뒤로하고 떠났다. 2년 전 '산악그랜드슬램'을 위해 산이 아닌 얼음 땅에 도전장을 내밀다 실패한 그가 다시 한번 북극을 향한 것. 산악그랜드슬램은 △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등정 △지구 3극점 도달을 의미한다. 당시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꿈의 기록이었다. 앞서 박영석은 2001년 7월22일 국내에서 산악인 엄홍길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에선 9번째로 히말라야 8000m급 14개봉을 모두 완등하면서 산악그랜드슬램 달성을 향한 첫 발을 내딛었다. 그는 이듬해 11월24일 남극 최고봉인 빈슨매시프(4897m) 정상에 오르면서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완등했다. 2003년 첫 북극점 도전에 실패 후 같은 해 10월 남극으로 발걸음을 돌려 이듬해 1월 남극점에 깃발을 꽂은 그에겐 남극점에 도달한 자신감이 있었다. 이전 실패를 교훈 삼은 박영석은 북극점 재도전에 앞서 옷과 신발을 직접 디자인하는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베트남은 전쟁 전 지배권을 찾으려 군대를 파견한 프랑스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호찌민이 지도하는 베트남 독립연맹(비엣민·월맹)은 1954년 프랑스군을 물리쳤지만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약을 통해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단시킨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같은 해 베트남은 남북 총선거를 통해 통일 정부를 구성하게 돼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에 의해 세워진 남베트남 정부(월남)와 이들에게 경제원조를 하던 미국은 협약을 거부했다.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남베트남의 경제는 정부의 부패로 인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결국 농민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다. 호찌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월맹)은 남베트남의 무장봉기를 지원하게 되고, 남베트남이 자력으로 국가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직접 전쟁에 개입한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폭격과 공습, 포격, 수색 섬멸 작전을 펼친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1932년 4월27일 상하이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을 답사한 스물다섯살 청년 윤봉길은 숙소로 돌아와 백범 김구 선생의 요청에 의해 유언을 작성한다. 일제의 압박으로 중국으로 온 그가 백범이 이끌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뒤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전승경축식 행사에 맞춰 의거를 행하기 이틀 전이었다. "제 시계는 어제 6원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입니다. 저는 앞으로 몇 시간 뒤면 시계가 필요 없습니다. 이 시계를 차시지요." 거사날인 84년 전 오늘(1932년 4월29일) 오전 7시쯤 윤봉길은 백범에게 시계 교환을 제안한다. 시계를 바꾼 뒤 백범은 윤봉길에게 "후일 지하에서 만나자"며 작별인사를 대신한다. 4시간 뒤 상하이 점령 전승경축식이자 일왕의 생일인 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