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무슨일이?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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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고 움직인다는 거짓 의견을 완전히 버릴 것이며… 앞으로도 이단의 의혹을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절대로 말이나 글로 주장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한 70대 천문학자가 1633년 로마 교황청 종교재판소에 불려가 '태양은 정지해 있고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지지하지 말 것을 강요당한 후 이와 반대되는 '천동설'이 옳다는 자백을 하게 된다. 그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곧바로 가택연금을 당한 후 남은 생을 보낸다. 약 350년이 지난 1979년, 당시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 노인에게 유죄를 선고한 것이 실수였을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고 결국 1992년 복권된다. 1564년 오늘(2월 15일) 이탈리아 피사에서 태어난 이 천문학자는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다. 그는 1590년 '피사의 사탑 실험'을 실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갈릴레이는 피사
"스피드 훈련 부족으로 우승을 놓쳐 아쉽습니다." 2000년 2월13일 도쿄 마라톤대회에 출전한 이봉주 선수는 2시간7분20초라는 한국 신기록을 경신하고도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날 낮 12시10분 도쿄국립경기장을 떠나 오모리를 반환점으로 돌아오는 마라톤 대회에서 자페트 코스게이(2시간7분15초·케냐)에 5초 뒤져 2위를 차지한데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당시 이봉주를 포함한 17명의 선수들은 함께 22㎞ 반환점을 돌았고 34㎞ 지점에서 8명의 선두그룹이 4명으로 좁혀지면서 우승 기대감을 높였다. 오르막이 시작되는 37.9㎞에선 알베르토 후스다도(스페인)가 뒤쳐지면서 코스게이와 공동 선두를 달렸지만 결승점을 1㎞ 앞두고 1위보다 30m 밀리게 됐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세운 기록은 1998년 네덜란드 로테르담마라톤 대회에서 자신이 세운 한국기록(2시간7분44초)을 24초나 앞당긴 기록이었다. 이는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봉달이'(봉주+달린다)라는 애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 한마디 말로 신이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창조했다고 믿어온 기독교 중심의 서구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생물학자가 207년 전 오늘(2월12일) 태어났다. 생물학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 학자는 '찰스 다윈'이다. 다윈은 1809년 영국 슈루즈베리의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명문대학에 진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학교를 떠난다. 그후 세계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때만 해도 여행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줄은 몰랐다. 다윈은 1831년부터 5년간 영국의 항해탐사선 비글호를 타고 태평양과 남아메리카, 호주 등 당시엔 오지로 여겨지는 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1835년 에콰도르 서안에서 1000㎞ 떨어진 갈라파고스에 도착해 섬마다 등껍질이 다른 거북과 부리 생김새가 다른 새(핀치)를 발견했다. 개별 종(種)들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한 종이 '자연선택'을 통해 새로운 종으로 변이할 수 있다는
1896년 2월11일 새벽. 고종은 세자와 가족들을 데리고 경복궁 내 건청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일제의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내린 결단이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거세졌다. 전국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나는 등 정세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건천궁에서 계속 지내는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친러파들은 친위대가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간 틈을 타 고종을 설득하고 나섰다. 일본의 위협과 간섭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 대사관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종은 당시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 150명과 포 1문을 서울로 이동하고 극비에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종은 이후 친일파로 꼽히는 김홍집·유길준·정병하·조희연·장박 등 5대신을 역적으로 규정, 포살명령을 내렸다. 박정양을 수상으로 하는 친러시아파 정부가 구성됐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1945년 광복 후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에서 귀국한 김구는 1947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 독립투쟁 위원회를 조직했다. 하지만 이미 남과 북 양측에는 단독 정권이 들어설 준비가 진행되고 있어 분단은 기정사실화 된 상태였다. 당시 이승만은 민족주의 측면에서 남측만의 단독 선거를 주장했고 북측의 김일성은 공산주의 체제에 맞춰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남측과 북측 모두와 대립 관계에 있던 김구는 1948년 2월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제목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성명에는 '우리를 싸고 움직이는 국내외 정세는 위기에 임하였다.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의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나에게 마지막 5분이 주어진다면 2분은 동지들과 작별하는데, 2분은 삶을 돌아보는데 그리고 마지막 1분은 세상을 바라보는데 쓰고 싶다. 언제나 이 세상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은 단 5분 뿐이다.' 19세기 러시아 소설을 대표하는 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가 1881년 2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러시아 빈민구제병원 군의관의 둘째 아들로 도시에서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 도시 문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 했다. 24세때 내놓은 처녀작인 '가난한 사람들'이 인정받으면서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1849년 사회주의자인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가 조직한 반정부 서클에 가담했다가 발각돼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는데 다행히 사형집행 직전 황제의 사면장이 도착해 극적으로 죽음을 면하고 시베리아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859년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자 잡지 '시대'를 창간하고 시사 문제에 대한 글을 썼다. 이후 아내와 형의 죽음, 농노 해방 뒤 사회적 혼란 등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 민족에 민족 자결의 기회를 주기를 요구하며 만일 그러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동을 취하여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1919년 2월8일 도쿄 치요다구 간다에 위치한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이날 재일 유학생들은 조선 유학생 학우회 임원선거를 위한 총회가 열린다는 통지에 속속 모여들었다. 1층 강당을 메운 600여명의 유학생은 무엇인가 일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고무돼 있었다. 두 달 전인 1918년 12월15일자 '저팬 애드버타이저'(일본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던 영자지)가 '재미 한국인들이 미국 정부에 독립 지원을 바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고 보도했었고 12월18일자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라는 기사도 유학생들을 북돋았다. 오후 2시에 맞춰 사회자가 개회선언을 하자마자 한 청년이 단상으로 뛰어올라 독립선언서를 읽어나갔다. 다음은 2·8 독립선언서에 포함된 결의문. 1. 본단은 일한합병이 오족의 자유의사에 출치 아니하고 오
'가난하고 고통받으며 박해받는 자들의 동정자였다. 그가 죽음으로써 세상은 훌륭한 작가 하나를 잃었다.'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한 소설가의 묘비에 적힌 내용이다. 산업혁명 시절 밑바닥 노동자들의 애환과 세상의 모순을 날카롭고 사실적으로 그리며 영국을 대표하는 문호로 평가받는 이 소설가는 '찰스 디킨스'다. 그는 204년 전 오늘(2월7일) 잉글랜드 포츠머스에서 해군 하급 문관으로 근무하던 존 디킨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고된 삶을 보냈다. 특히 12세 때 채무 문제로 수감된 아버지를 대신해 돈을 벌기 위해 런던의 구두약 공장에서 하루 10시간씩 일했는데 당시의 경험이 작품의 주제가 됐다. 작품 속의 사실적인 인물 묘사는 바로 디킨스 자신이 투영된 것이다. 스물 여섯살의 나이에 발표한 '올리버 트위스트'로 일약 유명 작가가 된 디킨스는 '위대한 유산' '크리스마스 캐럴' '어린 시절' 등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보고 상류사회를 마음껏 조롱하고 풍
잉글랜드 프로축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홈구장 올드 트래포드에는 '뮌헨 메모리얼 클락'이란 시계가 있다. 이 시계는 1958년 2월6일을 가리킨 채 멈춰있다. 이날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을 비롯한 축구팬들에겐 잊을 수 없는 비극의 날이다. 맨유 선수들은 유고슬라비아(현재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등 7개국으로 분리)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와의 유러피언컵(챔피언스리그 전신) 경기를 마치고 맨체스터로 돌아가던 도중 급유를 위해 독일 뮌헨에 착륙했다. 하지만 급유를 마친 비행기는 활주로에 쌓였던 질퍽한 눈 탓에 두 번에 걸쳐 이륙에 실패했다. 결국 세 번째 이륙 시도를 했지만 비행기는 충분한 높이까지 날아오르지 못하고 추락한다. 비행기는 인근 민가에 떨어지는 바람에 인명 피해가 컸다. 이 사고로 21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이후 2명이 추가로 사망하게 된다. 23명의 사망자 가운데 맨유 선수는 8명이었고 3명은 맨유 구단 관계자, 나머지 12명은 기자와 비행기 공동기
1955년 12월1일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한 흑인 여성이 '흑백 분리 좌석제'에 따라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기사의 요구를 거부했다. 당시 미국 남부에선 인종차별법인 '짐 크로우법'에 의해 흑인과 백인은 거의 모든 일상생활에서 분리돼 생활했었고 버스와 기차같은 대중 교통수단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버스기사 요구를 거부한 흑인 여성은 결국 경찰에 체포된다. 103년 전 오늘(2월4일) 앨라배마 주 터스키기에서 목수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 흑인 여성의 이름은 '로자 파크스'다. 로자 파크스가 체포되자 382일 동안 몽고메리 버스 승차거부 운동이 펼쳐졌다. 이 운동은 인종 분리에 저항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전체의 인권운동으로 번졌다. 이때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승차거부 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결국 1956년 11월13일 미 연방대법원은 몽고메리의 흑백 분리 버스 탑승 제도가 위헌이란 판결을 낸다. 이후 앨라배마주와 함께 플
15세기 이전까지 유럽에서 '책'은 고가의 물건으로 부유층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목판에 글자를 새겨 먹물을 묻혀 찍어내는 목판인쇄술이 개발됐지만 한 글자라도 틀리게 새길 경우 목판을 처음부터 다시 새겨야하는 힘든 작업과정이 뒤따라서다. 성서를 목판에 인쇄해 파는 일을 하던 한 유럽의 인쇄업자는 실수 탓에 목판을 버리고 새로 작업해야 하는 과정을 벗어나기 위해 구리를 녹여 단단한 금속활자를 만들 생각을 했었다. 오랜 시간 노력한 끝에 그는 한 기술자와 함께 금속활자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금속활자를 이용한 활판 인쇄기의 발명으로 책의 대량 생산화를 이끈 이 인쇄업자는 바로 '요하네스 구텐베르그'다. 구텐베르그에 의해 1454년 인쇄된 '구텐베르크 성서'는 서구에서 최초로 등장한 활판 인쇄물이었다. 활판 인쇄기의 등장으로 대량으로 만들어지자 책값이 저렴해졌고 그동안 책을 읽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 읽었던 평민들도 책을 살 수 있게 됐다. 부유층의 특권이자 독점체제였던 지식과 정보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시대를 풍미했던 댄스가수 유승준(영문명 스티브 유)이 2002년 2월2일을 기점으로 한국 땅을 밟지 못하게 됐다. 연예인 병역 기피의 상징이 되다시피 한 사건이었다. 유승준은 1997년 1월 정규 1집 앨범 '웨스트사이드'에 수록된 데뷔곡 '가위'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데뷔와 동시에 흥행가도에 올랐다. 이후 '나나나', '열정' 등 연이어 히트곡을 발표하며 2000년대 초까지 높은 인기를 누렸다. 유승준의 병역 기피 문제가 불거진 건 2002년이다. 그해 1월 유승준은 입영 통지서가 나와 있는 상태에서 일본 콘서트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했다. 병무청에 따르면 당시 유승준은 지인 2명을 보증인으로 세우고 콘서트가 끝나면 귀국하겠다고 서약했다. 하지만 2002년 1월 유승준은 일본 공연을 마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해 2월2일 유승준은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려 했으나 병무청은 그를 병역기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