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무슨일이?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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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변호사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변호사의 필요성이 등장한 건 1894∼1895년 갑오·을미개혁으로 조선의 법제도가 바뀌면서다. 관아에서 임명된 수령이 독자적으로 재판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재판소에서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제도로 변화했다. 오늘날 법원 격인 재판소와 범죄자를 수사하고 기소하는 검찰제도가 최초로 탄생한 것이다. 제도가 바뀌다보니 전문인력의 수요도 생겼다. 처음부터 변호사 제도가 도입되진 않았다. 1895년부터 1905년까지는 소송인의 재판과정에 도움을 주는 대리인 제도가 있었다. 행정절차와 변호 모두를 맡을 수 있었지만 특별한 자격요건은 두지 않았다. 변호사자격을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1905년. '광무 변호사법'에 따르면 민사소송이나 형사소송 당사자는 변호인을 통해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다. 이때 사법제도는 평리원과 한성재판소로 구성되는 2심제도였다. 이 법에 따르면 법관전고에 합격한 자와 시험에 급제한 자, 변호사시험에 급제한자, 변호사 시험위원을 역임한자
'사랑을 행동으로'(Love in Action) 61년 전 오늘(1955년 10월12일) 미국에서 건너온 해리 홀트·버다 홀트 부부는 한국인 전쟁고아 8명을 입양하고 다른 4명의 아이들의 미국 입양을 주선한다. 홀트 부부는 국내 아동복지 사업의 전기를 마련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이 세운 '홀트아동복지회'는 1957년 첫 국내 입양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약 20만명의 아동에게 새 가정을 찾아 주었다. 외국인이 설립한 이곳이 오늘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회복지기관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홀트 부부가 첫 입양을 결심한 건 1954년 어느 가을, 당시 미국 오리건주에서 농장을 운영했던 이들은 마을회관에서 상영하는 한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게 된다. 이 다큐는 한국전쟁이 남긴 전쟁고아들의 참상을 담은 내용이었다. 특히 미군 병사들과 한국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고아에 대한 내용은 모든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영화 말미엔 고아들을 돌볼 손길이 필요하다는 호소가 곁들여 있었다. "우리와 같은 가
"전쟁으로 무너진 대한민국을 부활시켜라." 6·25 전쟁 막바지 무렵, 휴전을 앞두고 남한에선 국산 항공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우리만의 기술로 비행기를 만들면 오랜 전쟁으로 땅에 떨어진 국민의 사기도 충전되고 '자주국방의 힘'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결국 공군기술학교 주관으로 김해 사천 공군기지에서 경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설계부터 제작까지 모두 순수 국내 기술로만 이뤄진 작업이었다. 그 결과 △몸체 길이 6.6m △날개 길이 12.7m △높이 3.05m △최대 85마력 △자체 무게 380㎏ △4기통 엔진 △최대 시속 180㎞ △순항 시속 145㎞ △탑승 인원 2명의 경비행기가 완성됐다. 완성된 지 하루만인 1953년 10월 11일 실시된 첫 시험 비행은 성공적이었다. 순수 우리 기술로 제작된 최초의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해 4월 3일 열린 명명식에서 전쟁으로 무너진 나라를 되살리겠다는 의미로 이 경비행기에 '부활
사람들은 들떠 있었다. 단체로 낚시여행을 왔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육지로 갈 배를 기다렸다. 이 곳 주민들은 김장철을 앞두고 잡은 멸치와 멸치액젓을 육지에서 팔 기대감에 부풀었다. 이 기대감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됐다. 이들을 싣고 육지로 향하던 '서해페리호'가 위도 부근에서 갑자기 뒤집어졌기 때문이다. 23년전 오늘(1993년 10월10일) 전북 부안군 위도 부근에서 292명이 바다에 수장된 대형 선박사고가 있었다. 일명 서해페리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고는 선박 관리 미비, 인력관리 부실, 해양경찰 등 정부의 늑장대응 등 2년 전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고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해페리호는 전라북도 부안과 격포사이를 오가던 여객선이다. 1990년 일본 한 선박회사의 여객선을 본따 설계해 만들어진 비교적 '신형' 여객선이었다. 이 배는 110톤급 철선으로 길이 33.9m, 폭 6.2m에 평균 시속 12노트로 운항됐다. 사실 이 배는 이용객이 많지 않아 매해 적자에 허덕였다.
"쾅!" 33년 전 오늘(1983년 10월9일) 미얀마 수도 양곤의 아웅산 국립묘지에 귀를 찢는 폭발음이 울렸다.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이 '전두환 암살' 목적으로 폭탄을 터뜨렸다. 현장에서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행사장에 조금 늦게 도착한 덕에 목숨을 건졌다. 그날 오전 전 대통령은 공식 수행원 22명 등을 데리고 동남아 5개국 순방길에 올랐다. 미얀마는 순방길의 첫 방문지였다. 전 대통령 일행은 미얀마 독립운동가 국립묘지 아웅산 묘소 참배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오전 10시 서석준 경제부총리를 비롯, 수행 공무원들과 경호원들은 행사장에 미리 도착해 예행연습을 시작했다. 오전 10시26분 예행연습을 마친 서석준 부총리는 전두환 측근으로부터 "전 대통령이 예정시간보다 30분 늦게 도착한다"는 무전 연락을 받았다. 이에 서 부총리는 '애국가 예행연습'을 한 차례 더 하기로 했다. 현장에 대기하던 북한 공작원 신기철은 오전 10시28분
'황후마마가 복도로 달아나자 뒤쫓아가 바닥에 쓰러뜨리고 가슴 위로 뛰어올라 세 번 짓밟고 칼로 시해했다.'(러시아 공사 위베르의 보고서) 일본정부에게 명성황후는 눈엣가시였다. 명성황후는 고종이 국정을 의논하는데 가장 의지한 상대였고 외국에선 왕인 고종보다 더 권력의 중심에 있다고 본 인물이었다. 명성황후는 하루라도 빨리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중 하나가 러시아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갑오개혁이 추진되는 동안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랴오둥 반도를 얻어냈다. 하지만 청은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을 끌어들여 다시 라오둥 반도를 돌려받았다. 조선 역시 일본을 견제하고 있는 러시아의 힘을 빌리면 일본 세력을 막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명성황후는 일본이 강제적으로 제정한 신제도도 구제도로 복구하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군대도 해산하고자 했다. 조선에서 반일 감정이 커지는 것을 느낀 일본은 이 모든 게 명성황후 때문이란
귀족과 백작. 왠지 중세시대의 느낌이 물씬 난다. 사기꾼 백작과 귀족 상속녀가 나오는 영화 '아가씨'가 그렇다. 으리으리한 저택은 유럽 중세시대를 연상케하며 이들의 호칭이나 설정은 왠지 동양의 전통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영화에서처럼 신분제가 실제로 우리나라에 존재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아가씨에 나오는 사기꾼 백작이 활동하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귀족이란 지위를 얻기 위해선 '나라를 팔아먹을 만한' 공(?)을 세워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106년 전 오늘(1910년 10월7일)은 조선에 '귀족'이라는 신분제도가 생긴 날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토종' 귀족은 아니었다. 귀족신분을 부여한 주체가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과 일본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 내에서 운영하고 있는 화족제도가 우리나라에도 적용됐다. 일본에서 화족은 메이지유신 이후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를 개편하면서 새로 만든 계급이다. 화족은 총 5계급으로 나뉘어 있으며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총
욤 키푸르는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이다. 유대 달력으로 새해 열번째 되는 날로 모든 유대인들은 이날 금식하며 1년 동안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기도하고 화해한다. 25시간 동안 국가의 기능은 완전히 정지된다. 버스와 열차, 비행기 등 모든 운행수단이 중단되고 모든 영업시설도 문을 닫는다. 뉴스를 포함한 텔레비전, 라디오도 이날은 방송되지 않는다. 군인도 마찬가지다. 군인은 소속 부대를 떠나 집으로 가고 최소한의 병력만이 남아 주둔한다. 1973년 10월6일이 욤 키푸르였다. 이날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스라엘로 향했다. 3차 중동전쟁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다. 이집트는 수에즈운하를 건너 시나이반도로 기습공격을 감행해 이스라엘의 거점을 점령했다. 시리아도 이스라엘군의 10배 넘는 병력을 이끌고 골란 고원으로 향했다. 이스라엘 17개 여단은 속수무책으로 전멸했다. 궁지에 몰린 이스라엘은 핵무기 카드를 검토하게 됐다. 하지만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이에 반대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
"증인 똑바로 대답하세요!" "이 부분이 사실입니까?" 1997년 터진 한보사태 때 김민석 전 의원은 '한보사태 청문회'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정치 신인이었던 그는 재벌 총수와 총수를 호위하는 여당 의원들에게 호통쳤다.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재벌에 반감을 갖기 시작했던 사람들은 그를 보고 '대리만족'했다. 김 전 의원이 정치신예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이보다 앞선 1988년 열린 청문회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감 스타 자리를 차지했다. 5공 비리조사에서 당시 민주당 의원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일해재단 의혹을 오목조목 짚었다. TV로 국감을 지켜보던 국민들은 과거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던 전두환 정권의 민낯을 하나하나 드러내주는 그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 청문회나 국정감사가 국민들에게 '사이다' 역할을 했던 때가 있었다. 정부의 비리나 의혹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국민이 정부를 감시할 수 있는 수단으로 떠오르면서다. 1988년 이전 16년 간은 국감이 열리지 못했다. 법적 근거가
"만약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이라면 그래도 나는 지금 하는 이 일을 계속하게 될까? 그 답이 '아니오'임을 알았을 때 나는 무언가를 바꿔야 한다고 깨달았다."(2005년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 중) 혁신의 아이콘이자 애플 공동 창업주 겸 전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가 2011년 10월5일(한국시간) 생을 마쳤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잡스가 사망한 날짜와 아이폰4S가 공개된 날이 같아 4S가 'For Steve'(스티브를 위해)에서 나온 제품이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입양과 대학 중퇴, 애플 창업, 세계 최초 개인용 컴퓨터(PC) 개발, 애플에서 축출과 복귀, 암 투병, 아이폰·아이패드 출시 그리고 죽음까지. 56년 그의 인생은 다사다난했다. 1955년 미혼모의 자식으로 태어난 잡스는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 입양됐다. 생모는 아버지의 반대로 시리아계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홀로 그를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양부모는 잡스가 대학을 졸업하길 희망했지만 그는 중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나를 제명하면 박정희는 죽는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국회의원 제명된 지 2주만인 1979년 10월 16일 부산·마산의 학생들이 당시 박정희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그가 가장 신임했던 부하 김재규로부터 저격당한다. 37년 전 오늘(1979년 10월 4일)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의원직을 제명당했다. 그가 의원직에서 제명당한 후 부마항쟁(10월16~20일)과 10·26사태 등 한국 현대사를 바꿀 일들이 줄이어 일어났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제명은 그가 9월 12일 한 외신과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뉴욕타임즈와의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 대통령을 제어해줄 것"이란 강한 메시지를 내세웠다. 당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과 같았던 김 전 대통령과 유신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박 전 대통령은 정적과 다름이 없었다. 박 전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는
경북 상주시 시민운동장에 마련된 무대에선 가수 현철의 마지막 리허설 무대가 한창이었다. 그의 대표곡인 '봉선화 연정'이 운동장 가득 울려퍼지자 밖에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던 관객들의 흥분은 점점 더 고조돼 갔다. 2005년 10월3일 당시 상주에선 자전거 축제가 한창이었다. 행사 프로그램 중 지역 주민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건 한 방송국의 가요콘서트. 설운도, 태진아, 현철, 장윤정 등 트로트 가수들은 물론 휘성과 SS501 등 아이돌까지 지방에선 보기 힘든 가수들의 출연이 예정됐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1만여명의 시민들이 운동장으로 모였다. 사고가 발생한 건 이날 오후 5시30분쯤. 녹화를 1시간30분정도 남겨두고 갑자기 직3문 출입문이 열리면서다. 아직 마지막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이 출입구 앞에는 5000여명 정도가 줄도 서지 않은 채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출입구가 열리자 기다리던 관객들은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5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