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bell note]
더벨|이 기사는 09월17일(08:56) 머니투데이가 만든프로페셔널 정보 서비스 'thebell'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100억원을 가진 A씨가 있다. 이 돈을 어떻게 굴릴까 고민하던 차, 전문가를 자처하는 B씨가 나타나 "내게 맡기면 최소 연15% 수익을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믿기 힘들면 자기 돈 5억원을 같이 태워 펀드를 만든 후 투자를 하겠다고 했다.
채권금리도 불만족스럽고 주식투자도 겁나던 A는 일단 B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자 B는 최소 7년간은 맡겨줘야 하며, 100억원을 굴리는 데 필요한 투자비용 등으로 매년 1%의 수수료를 달라고 요구했다. 찜찜하긴 했지만 A는 이것도 수용했다.
그런데 문제는 7년뒤 발생했다. 최소 연15% 운운하던 B가 수익은 커녕 -10% 라는 손실을 내고 만 것. B는 A를 찾아가 '예상치 못한 금융위기 발발'을 운운하면서 "나 역시 투자자여서 똑같이 손해를 봤다"고 강조했다.
대차대조표를 그려보자.
A씨의 최종성적표는 (원금100억)-(수수료합계 7억원)-(손실 10억원)=83억원이 됐다. 7년간이나 100억을 맡겨놓고 무려 17억원을 헛돈으로 날린 셈.
반면 B씨는 (원금5억원)+(수수료 합계7억원)-(손실5000만원)= 11억5000만원으로 펀드는 손실이 났는데 되레 6억5000만원을 거둬가는 결과가 나왔다.
당신이 A라면? 돈 잘 굴려달라고 무려 7년간이나 수고비까지 줘가며 돈을 맡겼는데 손실을 낸 B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을까. "네가 투자를 엉망으로 했으니 네 돈으로 내 손실을 메워달라"고 하고 싶지 않을까.
단순 도식화시킨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 VC/PE업계에서 논란이 된 '우선손실충당' 혹은 '우선배당'의 문제가 꼭 이런 식이다. "당신 돈부터 먼저 손실처리하자"는 게 바로 우선손실충당이고, "일단 내 원금부터 받고 남는 돈은 네가 가져가라"는 게 우선배당이다.
운용사(GP)들은 이 우선손실 충당제도에 대해 수년간 '폐지돼야 할 악습'이라고 규정해 왔다. 최근 들어서는 VC업계를 중심으로 중소기업청을 설득, 법제화까지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선손실충당이나 우선배당을 갖고 시작하는 건 '대체투자'가 아닌 '예적금가입'과 마찬가지다", "투자자(LP)들도 엄연히 리스크 테이킹을 해야 한다"는 게 GP의 주된 논리다. 그래서 이 제도(혹은 관행)가 시장 성숙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분명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런데 여기서 딜레마가 하나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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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크 테이킹은 분명 '도박'과는 다른 의미다. LP로서는 안정적인 밑받침 없이 "어떤 GP를 고르느냐"는 리스크를 해결하려면 무조건 믿을만한 GP만을 고르는 수밖에 없다. 실력이 없거나, 시장의 초보자인 GP는 아예 거들떠 보지도 말아야 한다. 자칫 그런 GP를 골라 돈을 맡겼다가 손해를 보면 그대로 '내 책임'이 되니 말이다.
그런데 100여개를 웃도는 국내 VC/PE업계의 GP가운데 '믿을만한 GP', 한마디로 수년간 꾸준히 안정적인 수익을 내 왔던 곳이 몇 곳이나 될까. 시장상황과 무관하게 채권수익률 이상의 IRR을 낸 곳은 몇곳이나 될까. 아쉽게도 다섯 곳을 꼽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국내 운용사들의 펀드 혹은 조합 수익률이 들쭉날쭉하다. 천수답마냥 매크로가 좋거나 운이 따라줄 때는 '대박'이 났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스란히 '쪽박'을 찬다. 기관투자가 입장에서는 50억, 100억원 짜리 벤처조합 수준이면 그래도 용인이 가능하지만 1000억~5000억원 수준의 PEF조차 이렇다면 상황이 곤란해 진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 잘 나가는 5곳을 뺀 나머지를 골라 대규모 자금을 맡긴다면. '모럴헤저드'란 소리를 들을 판이다. 기관투자가라고는 하지만 국내 LP들 대부분은 국민들의 돈을 굴리는 공공기관 성격이 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 LP들도 자기 돈이 아닌, 남의 돈을 받아 굴리는 곳이다. 그러니 "안정적으로 채권투자에 앞장서고 VC/PE 같은 위험한 투자에는 아주 잘하는 몇 곳만 골라주라"고 얘기하는 게 맞다.
이렇게 되버리면 나머지 95개 운용사들은 이제 돈을 받을 곳이 없어진다. 아쉽게도 국내 PE/VC업계의 LP 풀은 극히 한정돼 있어 몇곳만 '개점휴업'하면 GP들은 손가락을 빨아야 할 상황이 발생한다. 시장 전반적으로 유동성이 막혀버린다.
특히나 신생 창투사, 신생 펀드운용사들은 아예 LP들로부터 돈을 받을 일이 없어진다. "새로 생긴 회사라면서 뭘 믿고 우리가 보장도 없이 돈을 맡기느냐"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우선손실충당이나 우선배당을 놓고 항상 GP들은 "시장이 성숙한 해외에서는 이럴 일이 없다"고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KKR, 블랙스톤 같이 LP로부터 "제발 내 돈 좀 갖다 쓰시오"라고 말을 듣는 곳에게 감히 우선손실충당을 요구할 LP가 어디있겠는가.
그런데 그 성숙했다는 해외시장에서는 '초심자'에게도 이런 대접을 해줄까? 처음 돈을 굴려보겠다고 찾아오는 GP에게도 "네, 알겠습니다. 우리돈 갖다 쓰시고, 수수료도 받아가시고, 손실나면 우리도 같이 손실 볼께요"라고 순순히 응해줄까. 그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생긴다.
좀 민망한 점은, 정작 이런 관습의 폐지를 요구하는 GP업계 내에서도 정작 한 푼이 아쉬운 펀드레이징 시절에는 '차별화'를 노리고 LP를 찾아가 먼저 높은 우선손실충당을 자청하는 곳도 없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국내 한 대형은행권 PE는 국민연금의 운용사 선정 컨테스트 과정에서 8%대의 우선손실충당을 당당히(?) 자랑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국회에 나아가서도 "그만큼 우리는 안정적인 펀드다"며 8%의 우선손실충당률을 자랑했고 영명하신 의원 나리들도 이에 고개를 끄덕이는 해프닝까지 발생했다. 아쉽게도 이 펀드는 컨테스트는 통과했지만 예상과 달리 최하위권 성적을 기록했다.
분명 우선손실 충당은 그대로 수용만하기에는 악용가능성도 없지 않은, 논란거리가 있는 관행이다. 그런데 누구나 감독당국의 간섭과 가이드라인을 거부하고 철저한 네거티브 시스템을 따르는 미국식 PEF를 요구하는 '사모'의 영역에서, 굳이 '법'이라는 공공의 도구까지 동원하면서 금지 운운해야 할 이유는 모르겠다. 어차피 '선수'들끼리 모여 무한경쟁을 벌이고 손실은 알아서 처리한다는 사모(Private) 영역이 아닌가.
펀드의 트랙레코드가 정말 탄탄하다면 LP들도 이들에게 별달리 우선손실충당을 얘기하지 않을 것이고. GP역시 이런 '논란'에 별 관심을 안 가질 것이다. 왜? 투자를 잘해 수익을 내면 그만이니까. 이런 제도가 아직도 법제화 운운 거리가 된다는 것 자체가 5년간의 시간을 쓴 국내 PEF시장이, 그보다 오랜 10년 이상의 업력을 가진 VC시장이, 그만큼 성숙하지 못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