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화학 넥스트 레벨] ① LG화학과 '초고중합도 PVC'

부드럽고 유연하다. 지난 10일 LG화학 대전연구소에서 '초고중합도 PVC(HRTP4000)'로 만든 인조가죽을 만져봤을 때 든 느낌이다. PVC(폴리염화비닐)라고 하면 딱딱한 파이프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고정관념이 완전히 바뀐 순간이었다. 고급 가죽을 만지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이 인조가죽은 최근 자동차 시트 등에 적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만난 김건수 LG화학 PVC/가소제 개발담당은 '초고중합도 PVC'로 만든 전기차 급·고속 충전기용 케이블도 소개했다. 그는 케이블을 직접 구부렸다가 폈다가 하며 "기존 소재로 만든 케이블과는 확실하게 유연성에 차이가 있어서 손쉬운 충전을 지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시중의 급·고속 충전기들의 경우 TPU(열가소성 폴리우레탄)나 TPE(열가소성 엘라스토머)와 같은 소재로 만들어지는데, 뻣뻣한 케이블 때문에 여성·노약자들이 애를 먹기 일쑤였다. 하지만 '초고중합도 PVC' 케이블을 직접 만져보니 큰 힘을 안 들이고 한 손으로 이리저리 옮길 수 있을 정도였다. 이미 고객사 공급이 시작된 이 제품은 가격까지 기존 소재 대비 저렴해 시장성이 뛰어나다. 특유의 유연성은 로봇 충전기 등 미래 인프라 콘셉트에도 부합한다.
'초고중합도 PVC'는 유연성 뿐만 아니라 고온·저온에서 버티는 능력과 강도 등을 극대화한 스페셜티다. 급속충전 발열 시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이유다. 김 담당은 "PVC의 단점인 내열성과 내마모성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새로운 개념의 '고내열 내마모 PVC'를 개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특성을 살려 자동차 내부 케이블, 바닥재 등에도 광범위하게 활용할 수 있다.
사실 PVC는 국내 최대 석유화학사 LG화학의 '근본'이다. 1976년 전남 여수에 준공한 PVC 공장으로부터 LG화학의 첫 석유화학 제품이 나왔었다. 2020년대들어서는 위기를 맞았다. 중국이 파이프·창호 등 건장재로 주로 쓰이는 범용 PVC를 찍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과잉생산에 일본의 PVC 사업군부터 고사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LG화학의 차례가 될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PVC 제품개발 및 고객 가공지원팀이 팔을 걷었다. 신소재 개발 등을 위해 지난 2년간 연구에 매진했고 '초고중합도 PVC'를 선보일 수 있었다. PVC의 중합도(4000 이상)와 가소제 흡수율(50 이상)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 강도·내열성·유연성을 업그레이드했다. 범용 PVC(중합도 1000, 가소제 흡수율 20~30 수준) 대비 혁신적인 성능 향상이었다. 튼튼하고 유연하면서도, 고열에서 견딜 수 있고, 가공성 역시 뛰어난, '세상에 없던' PVC 였다.
LG화학은 여수공장에 위치한 6개의 PVC 생산라인 중 두 개를 '초고중합도 PVC'용으로 바꾸며 이 소재에 힘을 주고 있다. 중국의 과잉생산에 따라 기존 석유화학 사이클이 무의미해진 시대에 LG화학이 택한 변화를 상징한다. 범용 소재를 월 수만톤 단위로 대량 판매하는 방식만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다. 오히려 월 수천톤 수준으로 고부가 제품을 생산하며 다양한 고객사 풀을 갖추는 기민한 대응이 필요하다. LG화학은 이같은 콘셉트로 '초고중합도 PVC' 시장을 이끌어 간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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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추격에도 자신감을 보였다. 김 담당은 "초고중합도 PVC는 제조 시 중합·후공정에서 많은 노하우와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중국 등 경쟁사가) 당장 구현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일반 PVC 또는 다른 소재와 블렌딩 하는 등 가공성이 개선된 신규 고부가 PVC 제품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