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시평] 자객만 있고 어른이 없는 사회

[MT 시평] 자객만 있고 어른이 없는 사회

정태연 기자
2015.12.09 02:46

지금처럼 한 해가 막바지로 치닫던 지난해 이맘때쯤 필자는 다가오는 새해에는 우리가 좀 더 건강한 사회에서 살 수 있기를 소망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벌써 그 한 해가 지나 또 다른 새해가 다가오는 요즘 그때 쓴 글을 다시 펼쳐보곤 한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올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지난해에 소망한 사회와 여전히 격차가 크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씁쓸한 생각도 한다. 왜 우리의 삶은 늘 개인적으로는 버겁고 사회적으로는 절망스러울까?

우리는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합리적인 판단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을 이해하는 사고의 기틀도 상당히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실제 삶을 지배하는 힘은 이와 무관하게 주로 감각적 욕구, 즉 섭취와 배설의 욕구에 기반한다. 그래서 삶의 이성적 가치나 규범은 머리에만 있을 뿐 삶을 운용하는 법칙은 우리의 감각적 욕구에 기반한다. 이처럼 세상을 이해하는 합리적 방식과 실제 삶을 운용하는 감각적 방식이 서로 어긋남으로써 우리의 삶이 우리의 눈에 제대로 된 모습으로 비쳐질 수가 없다.

감각적 욕구를 우선시하는 사회는 공동체적 삶의 가치나 목표를 생성할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다. 감각적 욕구는 1차적인 것으로 거기에는 사회적 가치나 목표와 같은 성숙한 사고와 이성적 이상이 들어갈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선 경제력 확보나 권력 획득도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감각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축적과 지배는 이러한 충족을 담보하는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곳에서는 공공의 선이나 이상이 존재하기 어렵고 대신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무소불위의 위력을 더할 뿐이다.

감각적인 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법칙은 합리적 사고나 판단이 아니라 물리적인 힘이다. 따라서 물리적 힘의 역학적 변동에 따라 사회의 운용법칙도 달라진다. 국가가 제정한 법도 이러한 도도한 변칙의 물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공적인 주장이나 견해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어제 제기한 자신의 주장이나 입장을 오늘 아무런 가책 없이 뒤집을 수 있는 사회다. 이런 곳에는 행위를 결정하고 판단하는 객관적이고 안정적인 기준이 없다. 신뢰와 원칙 대신 빈말과 변칙만이 난무한다.

공동체적 가치와 목표라는 큰 우산 아래 다양한 개인적 삶이 전개될 때 그러한 삶이 모여 지혜의 큰 강물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산의 부재 속에서 사회가 오직 개인적인 욕망에만 의존할 때 성찰적 삶의 바탕이 되는 역사적 유산을 간직하기 어렵다. 그래서 사회적 삶에 대한 축적된 경험이 없어 세상을 좀 더 성숙하고 깊이 있게 바라보기 어렵다. 세상을 보는 시각, 추구하는 삶의 목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지금이나 한 세기 전이나 큰 차이가 없다. 이런 사회에서 경험을 통한 배움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비극은 개인적 삶의 차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성적 사고와 판단에 기반한 보편적 가치와 목표를 도외시하는 사회에선 인생을 더 많이 산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나 깊이에서 큰 차이가 나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갈등이나 문제가 발생하면 어른은 없고 자객만 있다. 수려한 어휘와 문체의 독설로 무장한 논객은 많을지언정 모두를 아우르는 큰 어른은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 땅 위에서 우리 선조들은 생명의 뿌리를 내려 가꾸면서 살아왔다. 이 땅 위에서 그들은 개인의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욕구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와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이 땅에는 바로 그러한 삶의 개인적·사회적 의미가 살아 배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땅을 우리 세대가 거친 야만의 불모지로 만들어서야 될 일인가. 우리 후손들에게 어떠한 모습의 삶을 터전을 물려줄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이 연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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