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300]

"저녁이 달라졌습니다. 건강관리를 위해 운동도 하고,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식품영양학 공부도 시작했어요. 처음엔 여유로운 저녁이 적응이 안되더군요. 이러다 실적이라도 나빠지면 어쩌나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 한 식당. '저녁이 있는 삶'을 이야기하는 A기업 임원은 에너지가 넘쳤다. 따분한 공장(취재) 이야기만 오가던 점심자리엔 저녁이 가져다 준 낯설고 싱싱한 화제들이 연이어 올라왔다. 오랫동안 그를 봐왔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어느 때보다 생동감이 묻어났다. 영업맨의 숙명인냥 접대약속이 빼곡했던 그의 캘린더엔 버킷리스트에나 오를 만한 일정들이 채워지고 있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연은 이렇다. 지난해 그가 다니던 회사는 해외본사로부터 정밀감사를 받았다고 한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과도한 접대비용이 가장 큰 문제였다. 감사 후 몇몇 임직원은 징계를 받고, 일부는 회사를 떠나야 했다. 해당 임직원은 "영업을 위한 것이었다", "한국의 접대문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해명하고, 항의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해외본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접대와 관련한 새로운 내부규정까지 만들어 시행했다. 그 내용을 보면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법)이 울고 갈 정도다. 우선 식사접대는 3만원을 넘지 못한다. 특히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원을 상대로 한 식사접대는 1만2000원 이하만 가능하다.
또 접대비용이 5만원을 넘으면 회사에서 정해둔 음식점들을 이용해야 한다. 기준을 넘어선 식사나 골프 등의 접대를 해야 할 경우 사전에 메일로 근거자료도 제출해야 한다. 접대 상대방의 회사계정 메일로 약소장소와 시간 등을 적어 보내 '흔적'을 남기는 식이다.
새로운 규정 시행 후, 특히 저녁 접대와 주말 골프 접대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 접대비용이 크게 준데다 회사계정 메일로 ‘흔적’까지 남기니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부담스럽게 된 것이다. 시행 초기엔 한국의 접대문화를 무시한 이 규정 때문에 영업실적이 감소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지만 현재 이 회사의 실적은 시행 전보다 오히려 더 성장했다.
"돌이켜보면 무의미한 접대가 많았습니다. 스스로 갑을관계에 얽매여 자원을 낭비한 것 입니다. 으레 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한거죠. 가장 중요한 건 우리의 경쟁력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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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국민권익위원회가 김영란법 시행령을 입법예고하면서 또다시 논란이 일고 있다. 시행령에 따르면 공직자나 언론인·사립학교 교사 등이 직무 관련인에게 3만원 이상 식사대접을 받으면 과태료를 내야 한다. 또 선물은 5만원, 경조사비는 10만원까지만 받을 수 있다.
이는 원안에서 후퇴한 것은 물론 모델격인 공무원 행동강령보다도 완화된 것으로 농·수·축산업 등 관련 업계의 요구를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시행을 앞두고 업계는 물론 정부까지 나서 내수위축을 이유로 법 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법 제정을 촉구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말 언론사 간부간담회에서 "(김영란법이) 경제를 위축시키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 논쟁이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부정부패와 적폐 해소라는 김영란법의 취지까지 흔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합리적 보안방안을 고민하되 법의 취지는 지켜져야 한다. 법 제정 당시 내수위축 우려에도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것은 부정부패와 적폐 속에 가라앉은 세월호등 추악한 현실을 청산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라 할 것이다.
국가경쟁력 향상과 경제 선순환은 청렴과 신뢰, 윤리등 사회적 자본을 기반으로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최하위권인 한국의 부패인식지수(CPI)가 1% 오를 때 1인당 명목 GDP가 연평균 0.029% 상승한다는 분석도 있다.
김영란법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투명하고 건강한 사회로 나아갈 것인지, 부정부패와 적폐 속으로 물러날 것인지.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나. 선택은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