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와 1980년대생 동료들이 '추월의 시대'란 저작을 펴낸 것은 지난해 12월이다. 여기서 '추월'의 의미는 다의적이지만 가장 간단하게 말하면 '한국이 선진국을 추월하는 시대'라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다소 조급했는데 이 '사실'과 '현상'이 지극히 임박했다 여겼고 우리가 선포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선점하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웬걸! 생각보다 사람들이 너무 시큰둥한 것이다. 우리 논의로 치면 '열등감 극복의 시대'인데 특히 기성세대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애초 열등감이 없었던 젊은이들의 경우 너무 당연한 얘기라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이러이러한 문제가 많다고 해야 제대로 된 진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미국에는 트럼프가 있었고, 일본에는 아베가 있었으며, 이탈리아에는 베를루스코니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 나라들이 선진국이 아닌가. 우리가 선진국이 된 것을 쑥스러워하는 현상은 오히려 우리가 '추격의 시대'에 선진국의 모습을 이상화하고 거기에 한국이 못 미치면 심하게 자학하던 심리적 패턴을 드러낸다.
사실 그런 태도가 우리 대한민국의 성장, 발전, 성숙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우리는 "이게 나라냐"고 읊조렸다. 우리는 그 읊조림이 "바뀐 세상에서 살고 있고, 그 세상이 불만족스러울지라도 다시 바꾸자"고 외칠 동력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태도를 범상한 일에도 확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래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해왔다. 지금까지는, 분명 그랬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한국의 위치가 상당히 미묘해져서 자학으로는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한국이 후발주자였을 때는 "우리가 이토록 미개하다"고 자조하고 선진국 정책을 베껴오는 것만으로도 대처가 가능했다. 한국이 최근 '잃어버린 30년'의 일본보다 나은 면이 있다고 평가받는 데도 그러한 태도가 만들어낸 혁신의 누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선진국이 되고 선진국과 대등한 높이에 선 시대에는 더이상 그러한 처신이 한국 사회에서 작동하는 정책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의료, 부동산, 교육문제 등을 성찰해본다면 사실 요즘 반성해야 할 건 한국이 선진국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이나 일본이 '킹왕짱'이니 이대로 하면 된다고 약을 판 사람들이다.
독자들의 PICK!
이렇게 얘기하면 이제 "국뽕을 경계하자. 국뽕은 안 된다. 국뽕은 나라를 병들게 한다"고 한다. 분명히 어제까지는 '일뽕'이던 치들이 "일본을 봐라. 국뽕으로 망가지지 않았느냐"며 '국뽕'을 반대한다. 일본 찬양은 되는데 한국 찬양은 안 된다는 것인가. 그렇게 치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수백 년 동안 '국뽕'으로 점철된 나라다. 왜 안 망하는가. 일본식 '국뽕'이 나라를 망쳤다면 그건 그들의 '국뽕'이 객관적이지 않고 패권적이었기 때문이다. 왜 일본의 오류를 한국에서 시정하려 드는가.
한국의 객관적 위치를 파악해야 한국 사회 문제해결의 방안을 탐구하는 게 가능하다는 게 나와 동료들의 저술 요지였다. 이렇게 말하면 최후의 반론이 닥쳐온다. '추월'을 논하는 것 자체가 촌스러운 콤플렉스라는 것이다. 맞다. 촌스럽고 콤플렉스다. 그런데 그간 한국은 열등감을 느낄 만했다. 콤플렉스가 있었다는 게 문제인가. 추월을 논해야 그 콤플렉스를 보편적으로 던져버릴 수 있다. 그다음에는 추월도 논하지 않게 될 것이다. 추월이 촌스럽다는 치들은 사실 '열등한 한국'을 멸시해야 하는 자신의 태도를 유지하는 게 장사가 되는 사람들이다. 콤플렉스를 벗어던졌다고 광고하지만 콤플렉스를 자극하고 광고하며 자기 삶을 영위하는 치들이다. 그런 이들을 모두 추월해 우리는 '추월의 시대'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