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당신의 생각을 꺼내 보여주세요

[기고]당신의 생각을 꺼내 보여주세요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2022.03.04 05:52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 사진제공=ETRI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 사진제공=ETRI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45년간의 연구개발 성과가 담긴 영문판 '연구개발사(史)'가 지난달 출간됐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국가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주한 외국대사관에도 보냈다.

프랑스에 계신 81세 은사님께 손편지와 함께 책을 보내드렸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부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유학길에 올랐던 1981년 이끌어주신 분이다. 열악했던 조국의 소프트웨어(SW) 기술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보탬이 되겠다는 목표였다. 세계적인 SW 강국으로 성장하길 꿈꾸며 낯선 이방인 학생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은사께 "오늘날 제가 있기까지 당신의 가르침이 있었고 영향이 지대했다"고 썼다. 편지 말미 '당신의 영원한 학생으로부터'라고도 덧붙였다.

40년이 흐른 지금, 우리 ICT(정보통신기술) 실력은 신입 연구원이 세계적 권위의 학술지에서 우수논문상을 받는 시대가 됐다. 40대 연구원이 SCI논문 80여편, 특허출원 300여 건의 성과로 전기·전자 분야 세계 최고 학술협회인 IEEE 석학회원(펠로우)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1세대 과학자들은 연구현장의 일선에서 퇴직하는 시점이다. 그들의 헌신은 조국의 과학 발전에 비옥한 거름이 됐다. 1980년대 선진 과학기술을 베끼던 '역공학(Reverse Engineering)' 시절이 있었다. 선진국의 완성품을 뜯어보며 국산화의 사명을 수행했다. 기술 불모지였던 한국이 선진 기술을 들여올 유일한 방법이었다. 1990년대 국제표준기술을 바탕으로 제품을 구현했고, 2000년대 선진국의 요소 기술을 모아 시스템 통합을 시도했으며, 비로소 2010년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데 이르렀다. 40여 년간 과학자들의 역공학이 '밑거름'이 됐다.

이 시간의 중심에 필자도 있었다. 과학자로서 연구개발을 경험하며 기술개발, 기술이전, 상용화, 연구소 기업 창업, 기업지원 등 모든 과정을 체험했다.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연구개발사의 중심에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세상을 떠나도 컴퓨터 시스템 SW 분야에서 필자의 연구성과가 대한민국 정보통신 기술 역사서에 살아 있을 것이다.

앞으로 후배 과학자들은 선진국과 신개념 창출 경쟁을 해야 한다. 이전보다 더 힘들고 외로울 것이다. 눈이 왔을 때 남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쉽지만, 이제는 첫 발자국을 만드는 과학자가 돼야 한다. 은사님은 30대 초반의 필자에게 늘 말씀하셨다. "당신의 생각을 꺼내 보여주세요"라고. 이제는 필자가 후배 과학자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됐다. 더이상 해외 과학자들의 논문이나 특허를 흉내낼 수 없다. 독창적인 생각과 방식만이 성공의 핵심 동인이다.

은사님이 고독한 과학자로 담금질해주셨던 덕에 조국의 SW 발전에 작은 보탬이 될 수 있었다. 45년사를 파일로도 보내주면 관련기관에 전달하겠다는 은사님의 말씀은 이제 더이상 제자가 아닌 연구 동반자로 인정해주시는 듯해 흐뭇했다. 엊그제 우수가 지났다. 그동안 혹독하고 추운 겨울을 견디며 꽃을 피우기 위해 영양분을 축적한 후배들이 꺼내놓을 새로운 '개념'을 맞이하기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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