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세계의 송년공연, 한국의 송년공연

[투데이 窓]세계의 송년공연, 한국의 송년공연

박동우 무대미술가·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2024.12.18 04:00
박동우(무대미술가·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박동우(무대미술가·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1892년 12월 18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차이콥스키 작곡의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막이 올랐다. 역사적인 그 초연 이래 호두까기 인형은 전 세계에서 송년공연으로 사랑받고 있다.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서도 독자적인 버전의 호두까기 인형이 매년 무대에 오른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발레단과 뉴욕시티 발레단, 영국 런던의 로열 오페라하우스와 잉글리쉬 내셔널 오페라, 오스트리아의 빈 국립오페라극장, 도쿄 발레단, 파리 오페라 발레단, 그 외 거의 모든 주요 국가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매년 공연한다.

한국에서도 호두까기 인형은 매년 연말 공연으로 전석 매진되는 인기를 모으고 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는 국립발레단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는 유니버설 발레단이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하고 있다. 전자는 볼쇼이 발레단 버전으로, 후자는 마린스키 발레단 버전으로 매년 무대에 올린다.

한국적인 송년공연은 없을까. 있다. '마당놀이'가 있다. 마당놀이는 1981년 MBC 창사 20주년 기념 공모전에 채택된 '허생전'을 정동 문화체육관에 올리면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그 후 1987년 창단한 극단 미추가 MBC와 함께 또는 홀로 공연을 제작하여 30년간 전국 수십개 도시의 체육관을 순회하면서 3000회 이상 공연하여 현대 한국의 대표적인 송년공연으로 자리잡았다. 레퍼토리는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등 판소리 다섯바탕 외에도 홍길동전, 배비장전, 박씨부인전 등 다양한 전통 스토리를 기초로 재창작했다. 그 후 2010년 30주년 기념공연인 '마당놀이전'을 끝으로 공연제작을 일시 중단했으나 4년 뒤 2014년 국립극장의 기획공연으로 부활했다. 금년에는 심청전, 흥부전, 춘향전을 합친 '마당놀이 모듬전'이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데 마당놀이 삼인방으로 불리는 윤문식, 김종엽, 김성녀가 특별 출연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런데 더 역사가 긴 한국 전통의 송년공연은 없을까. 있다. 서양에 호두까기 인형이 있다면 한국에는 '나례'가 있다. 나례는 궁중과 관아, 민간에서 행해 온 섣달 그믐밤의 벽사진경 의식으로, 사악한 귀신과 역질을 걷어내고 경사스러운 신년을 기원하는 종교의식이 예술적으로 발전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례가 기록된 최초의 문헌은 고려 정종6년(1040년)의 나례를 기록한 '고려사'인데 그때부터만 치더라도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송년공연이다.

나례는 고려에 이어 조선에서도 계속됐다. 조선의 궁중나례는 의외로 그 형식에서 상당히 유연한 오락적 행사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조선의 사관들은 투철한 책임감으로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목숨을 걸고서 일일이 기록한 것으로 유명한데 유일하게 섣달그믐밤의 나례만큼은 참관은 하되 기록하지 않았다고 한다. 1년 365일 중 유일하게 사관조차 붓을 내려놓고 이 난장을 관람하며 즐겼던 것이다.

오늘부터 사흘간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공연되는 '나례'는 국립국악원 소속 공연단 150여명이 무대에 오르는 화려한 송년공연이다. 구슬처럼 아름다운 전통나례의 개별 공연종목들을 스토리텔링이라는 실에 꿰어 기승전결 구조를 갖춘 것이 특징이다. 전통 나례에 있었지만 오랜 기간 전통이 끊어졌던 사방신춤, 방상시춤, 십이지신춤, 역신춤, 진자춤 등을 재창작하여 되살려낸 것도 공연사적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섣달 그믐날, 민간 광대들이 궁궐에 들어와 한바탕 유쾌하게 놀면서 세태를 풍자하고 역신을 물리치는 것이 주 내용인데 특히, 어른들이 구스르고 겁박해도 물러나지 않던 역신들이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놀이에 못견디고 물러나는 부분이 재미있다.

국립국악원의 '나례'. 고려적에 시작하여 조선을 거쳐 1000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나례'야말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한국 전통의 송년공연이 아닐까.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