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냐 안보냐, 누가 만든 가짜 이분법인가[기고]

기후냐 안보냐, 누가 만든 가짜 이분법인가[기고]

유종민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겸 미국 포틀랜드주립대 경제학과 겸임교수
2026.05.06 07:51

호르무즈 해협이 흔들리자 '기후 약속보다 에너지 안보가 먼저'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명제 안에는 교묘한 전제와 정치적 프레임이 숨어 있다. 에너지 안보와 기후 대응이 서로 대립한다는 가정이다. 과연 그런가?

한국은 주변국 전력망과 연결되지 않은 '에너지 섬'이다. 수입 화석연료에 사실상 100% 의존하는 구조에서, 국경 안에서 자립 가능한 전원은 '연료비 0'인 자원이다. 그런 면에서 재생에너지는 기후 의제이기 이전에, 한 번 깔리면 환율과 연료가격 충격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자 헤지 수단이 된다. 해협을 통과하지도, 유조선 운임 급등에 흔들리지도 않으며, 외교 관계가 끊긴다고 발전을 멈추는 일도 없으니, 지정학적 리스크를 내재화하지 않는 셈이다.

태양광·풍력·배터리 저장 기반의 분산 전원 체계는 공격자 입장에서는 값싼 드론 공격조차 가성비가 안 맞다. 일부가 피해를 입어도 전체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는다. 반면 대형 발전소는 미사일 한 발로 광역 정전을 일으킬 수 있는 단일 취약점이다. 에너지 안보를 외치면서도 대형 집중 전원만을 해법으로 내미는 것은, 그래서 역설이다.

기후 대응과 에너지 안보는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 산업의 논리와 기후의 논리는 이미 현실에서 만나고 있다.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빅테크AI 데이터센터도 전력 조달 안정성과 비용 경쟁력이 주 관심이다. 이들이 대규모 원전 및 재생에너지를 수용하는 이유는 환경 의식이 아니라 AI 시대의 에너지 주권을 자기 손에 두려는 전략 자산화이다.

한국 기업들도 꾸준히 성장의 기록을 쌓아왔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자체 개발한 8MW급 해상풍력 발전기로 영광 야월 EPC(설계·조달·시공) 공급계약을 따냈고, LS전선과 LS마린솔루션은 부유식 해상풍력 해저케이블 시장에서 노르웨이 에퀴노르·덴마크 CIP와 손잡았으며, 한화큐셀은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세액공제로 미국에서 흑자 전환했다.

모두 안방 트랙 레코드와 양산 학습곡선 위에서 지속 가능한 성과들이다. 안방 입찰이 정치적 이유로 지연되면 글로벌 수주 레퍼런스가 끊기고 R&D 투자 회수가 어려워지며, 결국 한국 산업이 아무 안전망 없이 미국·유럽 정책 변화에 통째로 노출된다. 실제로 그동안 국내에선 재생에너지 분야의 경쟁력과 사업성이 높아지려는 그 순간, 바로 앞이 가로막히는 경험을 수도 없이 겪었다.

다만 이러한 가로막힘조차 결국 방향이 아닌 속도의 차이에 불과했다. 변화를 노골적으로 반대하던 일부 이해관계자들도 국제적 추세와 불가피한 합의 앞에서 결국 입장을 바꿔왔다. 다만 10년에 걸쳐 조용히, 체면을 잃지 않을 속도로. 결국 시대를 거스른 자리에 남는 것은 자기 진영의 입지 축소 뿐이었다. 질서, 자유시장, 국가 안보라는 가치가 특정 전원에 대한 편애 및 증오와 동일시되어 퇴행적·시대착오적 경직성으로 변질되어 선 안 될 일이다.

이익을 중심에 두고 판단하는 기업들처럼, 국익 즉 국민의 이익을 중심에 두고 생각해보자. 지금 필요한 것은 "기후냐 안보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다. 그 질문 자체가 잘못 설정되었음을 직시하는 것, 더 나아가 이 논쟁을 바라보는 나 자신이 이미 낡은 프레임에 포획되어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먼저 묻는 용기다.

유종민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사진=외부
유종민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사진=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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