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흔히 뛰어난 기술이나 창의적인 아이디어에서 혁신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혁신적인 기술과 아이디어는 중요하다. 하지만 혁신의 또 다른 중요한 원천은 '다양성'이다. 서로 다른 경험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문제를 바라볼 때 기존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해법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최근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발표한 '스타트업 이사회와 성별 다양성: 혁신의 균형을 찾아서' 보고서는 이 사실을 데이터로 보여준다. 국내 주요 스타트업 250개 기업의 이사회 구성을 분석한 결과 여성 이사 비율은 평균 6.9%에 불과했다. 분석 대상 기업의 70.8%는 이사회 전원이 남성으로 구성돼 있었고 여성 이사가 한 명이라도 포함된 기업은 29.2%에 그쳤다.
이 수치는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의사결정 구조가 여전히 성별 기준으로 편중된 네트워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혁신을 추구하는 생태계지만 정작 의사결정 구조는 여전히 동질적인 집단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성과에서 나타난 차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사회에서 여성 이사 비중이 일정 수준 이상인 기업들이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투자 유치 규모와 매출 증가율에서 더 높은 성과를 보였다. 여성 이사 비중이 20% 이상인 기업의 평균 누적 투자 유치 금액은 약 1380억원으로, 20% 미만 기업(1118억 원)보다 평균 262억원 더 많았다. 매출 증가율도 여성 이사 비중이 높은 기업과 낮은 기업이 각각 평균 53.3%와 32%로 의미있는 차이를 나타냈다.
이 결과는 단순히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양성이 의사결정의 질을 높인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경영학에서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집단이 동질적인 집단보다 더 나은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많다. 서로 다른 경험과 관점이 충돌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획일적인 집단사고(groupthink)를 피하고 더 많은 전략적 대안을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에게 이러한 다양성은 특히 중요하다. 스타트업은 불확실한 시장에서 새로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조직이다. 기존의 성공 공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만 모여 있다면 사고의 범위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다양한 경험과 시각이 모일 때 혁신의 가능성은 훨씬 커진다.
다양성은 성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경험, 전공, 국적, 세대, 그리고 지역까지 포함된다. 특정 학교, 특정 기업, 특정 지역 출신 중심의 네트워크만으로 구성된 생태계는 빠르게 성장할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가 등장하기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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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이 아닌 지역 스타트업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기업이 스타트업에 투자해야 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기후위기 같은 거대한 문제부터 일상의 작은 불편까지 자양한 스타트업에 투자해야 대기업이 놓치는 문제를 보완할 수 있다. 획일적인 생태계에서는 새로운 문제와 기회를 발견하기 어렵다. 다양한 스타트업이 발견한 문제는 또 다른 혁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혁신 생태계에 다양성이 필요한 이유다.
실제로 실리콘밸리 같은 세계적인 스타트업 생태계들의 경쟁력도 결국 세계 각국의 인재와 문화가 결합된 다양성에서 나온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생태계 내부의 인적 구조는 여전히 좁은 네트워크에 머물러 있는 측면이 있다. 스타트업 이사회에서 여성 비중은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양성은 사회적 가치나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혁신을 만드는 중요한 경쟁력이기 때문에 필요하다. 스타트업 생태계가 다음 단계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자본뿐 아니라 다양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정책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
혁신은 한 사람의 뛰어난 천재성에서 나오기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최성진 스타트업성장연구소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