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생각 다른느낌]현행 법으로는 소비자보호 미흡, 법 개정 서둘러야

2011년 ‘옥시싹싹’을 비롯한 가습기 살균제 유해성 논란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지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피해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10여년에 걸친 가습기 살균제 판매로 피해자가 속출하는데도 제대로 된 보상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2000년에 제정된 ‘제조물책임법’이 국내 소비자 보호에 인색하기 때문이다.
뒤늦게야 여야 의원들이 ‘가습기살균제특별법’을 만들자며 허둥지둥하고 있다. 또한 새누리당은 최근 국회차원의 청문회 개최를 야당에 제안하고 야당은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야단이다.
이번 사태는 기업의 부도덕성이 극에 달한 사건이며 정부의 늑장 대처가 결합돼 피해자를 양산하고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줬다.
기업은 농약에나 쓰일 법한 원료를 버젓이 가습기 살균제로 둔갑해서 팔았고 원료의 유해성 여부가 시험결과 밝혀졌는데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정부는 피해 신고가 잇따르고 제품의 위험성이 제기됐는데도 안일한 대처로 피해를 키웠다. 그동안 피해가족은 건강과 생명을 잃고 가정은 파탄이 났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최근 더불어민주당 서영교 의원이 '집단소송제'를 반드시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집단소송제가 시행되면 피해자가 별도의 제외신고를 하지 않는 한 판결의 효력이 피해자 전체에게 미치게 돼 소비자 피해구제에 도움이 된다. 또한 기업의 행위가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인 경우 손해액의 몇 배를 배상하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도입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국회나 정부가 기존의 ‘제조물책임법’ 제·개정에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피해자들이 힘든 싸움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2000년 제정된 제조물책임법은 가습기 살균제 논란이 한창이던 2013년 한 차례 개정된 바 있으나 법 문장을 한글화해서 읽기 편하게 만든 것이 전부였다. 법 문장을 읽기 편하게 만든만큼 소비자 피해구제도 쉽게 행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 소비자 보호에는 미흡한 실정이다.
현행 법으로는 피해자 구제에 속수무책이며 국민의 건강과 생명은 안전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세 가지의 개선방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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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제조물책임 분쟁조정중재원 신설이 필요하다. 피해자가 법정 소송 전 선택적으로 피해구제를 신청하고 분쟁을 조정해 줄 분쟁조정중재원 신설을 고려해야 한다. 만일 분쟁조정중재원이 있었다면 조금이나마 피해구제에 신속한 대처가 가능했을 것이다. 분쟁조정중재원은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여 독성검사를 실시하거나 각 부처간 업무분장을 지휘할 수 있다.
이번 가습기 살균제 피해사건의 경우 소비자들이 피해를 호소했음에도 정부의 무사안일한 태도와 책임 떠넘기식으로 피해는 확산됐고 피해자들의 고통은 증가했다.
2006년 홍수종 서울아산병원 교수가 가습기 살균제의 심각성을 질병관리본부에 알렸는데도 바로 역학 조사에 나서지 않았다. 또한 환경부는 제품성분보고서를 받고도 독성검사를 실시하지 않았으며 산업통상자원부는 가습기살균제가 검사품목이 아니라며 모른 척 했다.
지난 2013년 제조물책임법에 관한 법무부와 공정거래위원회 용역과제를 수행한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박동진 교수는 ‘제조물책임 분쟁조정중재원’ 신설에 대해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운영 결과를 분석해 성공여부를 지켜본 후 설립을 검토하자는 절충안을 내놓은 바 있다.
둘째, 증명책임의 ‘완화’ 또는 ‘전환’이 필요하다. 현행 제조물책임법은 가해자가 고의·과실 유무에 상관없이 결함의 존재에 책임을 지는 엄격책임을 따르고 있으나 피해자는 결함과 손해여부 등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기술이 발달하고 제품이 복잡해질수록 제품의 하자를 알거나 그로 인한 피해를 입증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번에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폐 섬유화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라는 것이 밝혀졌다.
피해자의 증명책임을 완화하거나 가해자에게 전환하지 않고는 여전히 피해자 구제는 유명무실하게 될 수밖에 없다.
셋째, 증거개시제도의 도입을 시급히 추진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민사소송법상 문서제출명령이라는 제도가 있으나 실질적인 처벌제도가 없으며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증거개시제도가 도입되지 않고 있다. 증거개시(Discovery)란 소송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소송 상대방에게 서류 등의 열람·교부를 신청할 수 있는 제도이다.
특히나 제조물책임의 경우 피해자가 자료를 열람할 수 없으면 제품의 하자나 피해원인을 파악조차 할 수 없다. 증거개시제도는 소비자의 피해구제를 위한 필수적인 제도이며 지난해 대법원에서도 ‘사실심 충실화 마스터플랜’의 핵심방안으로 도입을 검토한 바 있다.
기업의 존립과 성장이 경제발전의 근간이지만 소비자의 안전과 생명을 담보로 기업만 키워서는 더 이상 기업도 소비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불신으로 이어진 소비심리 위축은 장기적으로 기업과 국가경제에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이 ‘봉’ 취급 당하는 것을 넘어 생명에 위협을 받게 놔둬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