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첫 이산가족 상봉 시작…2015년까지 총 19차례 열려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
방송에는 패티김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노래가 뒷배경에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옷차림새나 어투는 조금씩 달랐지만 얼굴 생김새나 체형이 영락없는 '핏줄'이었다.
서로 생사 확인도 못하고 살았던 30여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당시 이 방송을 보던 시청자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며 분단의 아픔을, 함께 하지 못한 가족들의 아쉬움을 함께 나눴다.
31년 전 오늘(1985년 9월21일) 첫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남북이 분단된 지 32년 만이었다. 당시 갓난 아기였던 자식은 성년이 됐고 새파란 청춘이었던 아버지는 백발이 됐다.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기까지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양측은 1954년 3월1일 만들어진 휴전협정에 의해 '실향민간귀향협조위원회'가 설치됐고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적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렇다할 논의가 진전되진 않았다.
이산가족 상봉 실마리를 푼 건 17년 뒤인 1971년 들어서였다. 그해 8월20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첫 회담이 열린 후 지루한 협상이 이어졌다. 예비회담만 20회, 본회담은 총 8회 이뤄졌다. 마침내 남북은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 자리를 마련했다.
이들은 총 6차례 12시간동안 만남을 가졌다. 그저 살아있다는 것에, 살아 생전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격했다. 당시 생사를 확인하고 만남을 가졌던 이산가족은 남북에서 각각 35명과 30명 뿐이었다. 이산가족 수가 1000만명에 달하는 것에 비하면 극소수였다.
이산가족들은 당시 상봉을 계기로 자신들도 헤어진 가족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또한 물거품이 됐다.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이상가족 상봉 협상 마저도 중단됐기 때문이다.
이산가족 상봉 문제는 2000년 6월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다시 물꼬를 텄다. 이때 이산가족 명단 교환, 생사 확인, 서신 교환 등의 작업이 시작됐다. 2달 뒤인 8월15일 광복절에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는 비교적 이산가족 상봉이 활발했다. 2005년까지 총 12차례의 이산가족 상봉을 실시하여 1만1788명의 이산가족들이 상봉의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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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들어선 남북관계가 급격히 악화돼 이산가족 상봉도 다시 중단됐다. 금강산에 관광을 간 박왕자씨 피살사건, 천안함 피격 등으로 이산가족 상봉도 무기한 연기됐다. 2010년 10월 가까스로 열린 이산가족 행사도 한 달 뒤인 11월 발생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중단됐다.
2011년 김정은 체제로 바뀌고 한국에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관계는 더욱 경색됐다. 이산가족도 논의되지 못했다. 그동안 이산가족들은 점차 늙어갔다. 가족을 그리워한 채 눈을 감는 실향민들의 아픔도 커졌다.
마침내 2014년 2월20일 이산가족 상봉은 재개됐다. 이미 백발노인이 된 이산가족 일부는 휠체어에, 자식들의 부축에 의존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가족들을 만났다. 가장 최근 있었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2015년 10월이었다. 남측 96가족 389명과 북측 96가족 141명이 만남을 가졌다.
이산가족들은 서로 만나기를 어느 때보다 간절하기 원하고 있다. 이산가족의 연령대가 대부분 80~90대로 고령이기 때문이다. 2015년 9월을 기준으로 지난 15년동안 이산가족이 하루 평균 12명 꼴로 사망했다는 통계가 나오기도 했다. 국제적십자회에서도 남북 이산가족 찾기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남북 정치적 문제와 분리해서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