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300][우리가보는세상]

“잘못은 즈그들이 하고, 와 수습은 국민들이 해야 하노!”
영화 ‘판도라’에서 지진으로 폭발한 원전을 수습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드는 하청근로자 재혁(김남길)이 무능력한 대통령과 무책임한 정부를 원망하며 던진 말이다.
영화는 원전 폭발이라는 픽션(이 아닐 수도)을 다루고 있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부조리와 적폐들은 우리가 직면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원청과 하청으로 이어지는 위험의 외주화, 전문성을 무시한 낙하산 인사, 재난 앞에서도 작동하지 않는 안전불감증 등등.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거슬리는 것은 나사 빠진 컨트롤타워다.
지진으로 ‘멜트다운(Meltdown 원자로용해)’이 발생했는데도 “별일 아니다”며 사건을 은폐·축소하려는 각료와 청와대 비서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초기대응에 나서지 않는 대통령은 강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주요 소재를 여객선 사고로, 주요 인물을 민간 잠수사들로 대치하면 세월호 다큐멘터리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영화는 현실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영화와 현실의 차이점은 대통령의 '마지막 고백'뿐이다. 영화 속 대통령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사죄하지만, 현실 속 대통령은 ‘여자로서의 사생활’이란 궤변 속에 숨어버리면서 국민적 공분만 키웠다.
수백 명의 어린 생명이 차디찬 바다 속으로 가라 앉는 숨가쁜 상황에서도 대통령이 서면보고와 머리손질 등으로 시간을 낭비한 기막힌 현실은 영화조차 따라가기 버겁지 않았을까.
“행복하고 안전한 나라에서 살고 싶다. 박근혜 즉각 퇴진하라!”
대통령의 사적 인연이 일으킨 국정농단 사태의 수습도 결국 국민들 몫이었다. 지난 7주간 750만명에 달하는 국민들이 정치적 득실만 따지고, 당내 계파의 눈치만 보던 정치인들을 대신해 촛불을 들고 나왔다.
무너진 대의제 민주주의를 바로잡기 위해 국민들이 또다시 거리로 나온 것이다. 그 결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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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현실 속 판도라(신화가 만든 여인)가 가져온 재앙은 끝난 게 아니다. 탄핵 정국은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았을 뿐이다. 이제 정치권이 촛불민심이 바라는 국가를 만드는데 앞장서야 할 차례다.
전국에서 뜨겁게 타올랐던 촛불은 단순히 박 대통령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최순실 게이트로 상징되는 부조리와 적폐들로 가득한 구체제에 대한 반기이자 폭발이다.
무엇보다 이 구체제를 청산하는데 정치권이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할 시점이다. 특권과 반칙, 불평등과 불공정이 판치는 정치·재벌·언론·검찰개혁을 비롯해 필요하다면 개헌 논의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
다만 개헌은 그들만의 정치공학을 위한 땜질식 처방이 아닌 인간의 존엄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용돼야 한다.
구체제 청산과 함께 공직사회와 사정기관 곳곳에 퍼져있는 비선인맥 청산도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권력에 빌붙어 자기욕심을 채운 내부자와 부역자들이 없었다면 대통령의 사적 인연이 국정을 농단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국회 청문회와 특검이 대통령 개인의 위헌·위법 행위를 밝히는 데만 주력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은 인간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이를 통제하고 이용하는 건 결국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