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운동 100주년]④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장례식)을 계기로 전개된 6·10 만세운동은 3·1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1929년)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으로 꼽힌다. 하지만 역사적 무게감에 비해 오랫동안 대중의 기억 속에서 소외되거나 '단순 소요' 수준으로 평가절하됐다.
조선총독부가 6·10 만세운동을 식민통치 체제에 도전한 사상운동이라며 경계심을 드러낸 사실이 '조선에 있어서의 동맹휴교의 고찰'(1929년)을 통해 최근 확인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제에 충격을 안겼던 항일운동이 해방 이후 대한민국 독립운동사 연구의 주류에서 상대적으로 비중 있게 다뤄지지 못한 배경에는 '이념의 벽'이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6·10 만세운동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등)이 이념적 차이를 넘어 학생 대중과 연대해 준비한 민족유일당 운동의 효시다. 특히 이듬해 신간회의 좌우합작으로 이어지는 민족협동전선 흐름의 중요한 계기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그런데도 운동의 성과는 광복 이후 오히려 항일투쟁의 역사를 가리는 족쇄가 됐다. 권오설(權五卨), 김단야(金丹冶) 선생 등 항일 격문을 작성하고 투쟁을 기획한 핵심 인물들이 사회주의 계열이었다는 적극적으로 조명되지 못했다.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냉전 체제 속에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역할은 독립운동 서술 과정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재평가가 시작된 건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다. 권오설 선생 등에 대한 정부 차원의 서훈이 이뤄지고 문재인 정부에선 6·10 만세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다만 학계에서는 여전히 6·10 만세운동의 정치·사상적 의미가 대중적으로 충분히 복원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명혁 동국대 연구교수는 "6·10 만세운동이 널리 조명되지 못했던 배경에는 조선공산당 등 사회주의 세력의 주도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역사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폭넓게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일제는 거사를 기획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대중적 상징으로 부각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고등경찰의 축소·은폐 탓에 운동의 조직적 성격이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6·10 만세운동이 학생 중심의 시위로 받아들여지는 원인이 됐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경무국 사료에 따르면 일제는 6·10 만세운동을 단순한 학생 시위가 아닌 '민족의식과 사회주의 사상이 결합된 항일투쟁'으로 규정하며 예의주시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6·10 만세운동은 일제의 민족분열 정책인 '문화통치'를 극복하고 통일전선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특히 바로 다음 해 신간회 운동으로 이어지며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상당한 비중이 있는 운동"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