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교육 오늘의 역사] 1830년 오늘 루이 필리프 왕위에 올라 프랑스 7월 왕정 성립

[MT교육 오늘의 역사] 1830년 오늘 루이 필리프 왕위에 올라 프랑스 7월 왕정 성립

MT교육 정도원 기자
2013.08.07 08:30
프랑스 부르봉 왕조와 방계 왕족 오를레앙 공작가의 가계도. 적색은 프랑스의 국왕, 청색은 부왕보다 먼저 죽는 등 왕이 되지 못했거나 왕이 아닌 사람, 황색은 프랑스가 아닌 외국의 국왕이 된 사람이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와 방계 왕족 오를레앙 공작가의 가계도. 적색은 프랑스의 국왕, 청색은 부왕보다 먼저 죽는 등 왕이 되지 못했거나 왕이 아닌 사람, 황색은 프랑스가 아닌 외국의 국왕이 된 사람이다.

1830년 오늘(8월 7일) 프랑스 7월 혁명의 결과로 '시민왕' 루이 필리프 1세가 새로운 국왕으로 취임해 7월 왕정이 성립했다.

◆부르봉 왕조의 방계 왕족 오를레앙 공작가의 역사

프랑스의 오를레앙 공작가는 국토의 5%에 달하는 크고 부유한 영지를 보유하고 있어 프랑스에 존재하는 여섯 개의 공작 가문 중에서도 가장 강력했고 그 서열은 국왕의 다음이었다. 이는 '공정왕' 루이 13세가 차남 필리프를 아껴 각별히 좋은 영지를 하사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방계 왕족으로서 직계 왕실과의 사이가 항상 좋을 수는 없었다.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일 때 '섭정공' 필리프는 자신의 큰아버지 루이 14세의 명을 받들어 에스파냐에서 열심히 싸웠는데, 그가 너무 열심히 싸우자 루이 14세는 되레 '내 둘째 손자 대신 자기가 에스파냐 왕위에 오르고 싶어서 저러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품고 견제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자 국왕 루이 16세의 두 동생 프로방스 백작과 아르투아 백작이 보수 반동 정책을 진언한 것과는 달리,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는 스스로 '평등공'을 자처하며 급진 혁명 세력인 자코뱅파의 편을 들었다. '평등공'의 아들 루이 필리프도 발미 전투에서 혁명군을 이끌고 싸우는 등 프랑스 대혁명에 가세했다.

◆1830년의 7월 혁명과 루이 필리프 1세의 즉위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당하며 1789년 대혁명으로부터 촉발된 유럽의 오랜 전쟁은 마무리됐다. 대혁명 와중에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동생, 왕제 프로방스 백작 루이 18세가 망명지인 영국에서 프랑스로 되돌아와 부르봉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루이 18세는 공공연히 "과인은 혁명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고, 혁명 전의 어떤 것도 잊지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극심한 반동 정책을 폈다. 특히 시대착오적인 귀족 우대 정책을 계속하였다. 후사가 없었던 루이 18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왕제 아르투아 백작 샤를 10세는 귀족 세력을 되살리기 위해 "대혁명 때 피해를 입은 귀족의 경제적 보상을 위해 국고에서 10억 프랑을 인출해 지급한다"고 하자 국민의 불만은 폭발했다. 결국 1830년 7월, 혁명이 발발해 샤를 10세의 퇴위 사태로 이어졌다.

7월 혁명의 수습을 위해 국민에게 인기가 많던 노장군 라파예트 후작이 나섰으며, 후작은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를 국왕으로 추천했다. 루이 필리프는 그 아버지가 프랑스 대혁명에 찬성해 '평등공 필리프'라는 애칭을 얻었을 정도였으므로 국민들의 공감을 얻어내고 사태를 수습하여 왕정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본 것이었다. 1830년 8월 7일,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는 정식으로 프랑스의 국왕으로 취임해 오를레앙 왕조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 1세가 되었으며 스스로를 '시민왕'이라 자처했다.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을 묘사한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부제는 1830년 7월 28일인데, 이는 27일 궐기한 시민들이 28일 혁명의 결정적인 국면이었던 시가전을 돌파해 29일 승리를 이뤄낸 것을 의미한다. 7월 혁명의 결과로 8월 2일 샤를 10세는 퇴위했으며 수습 과정을 거쳐 8월 7일 오를레앙 공작이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을 묘사한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부제는 1830년 7월 28일인데, 이는 27일 궐기한 시민들이 28일 혁명의 결정적인 국면이었던 시가전을 돌파해 29일 승리를 이뤄낸 것을 의미한다. 7월 혁명의 결과로 8월 2일 샤를 10세는 퇴위했으며 수습 과정을 거쳐 8월 7일 오를레앙 공작이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루이 필리프 1세 시대의 경제 성장과 정치 불안

오를레앙 왕조 루이 필리프 1세의 치세는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불안'으로 요약된다. 산업자본가 세력에 의해 옹립된 루이 필리프 1세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프랑스를 '영국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프랑수아 기조와 같은 유능한 인재를 총리로 기용했으며 철저한 입헌군주제와 내각책임제를 실천했다. 또 영국을 본따 프랑스의 산업 혁명을 촉진했으며 철도를 부설하고 해외 식민지 개척에 나서기도 했다.

반면 정치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루이 필리프 1세 치세에서 산업자본가에게 밀려버린 귀족 세력과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지방 농민들은 7월 혁명에 의해 타도된 부르봉 왕조를 지지하는 반동적 왕당파의 확고한 지지층이었다. 한편 도시 서민과 노동자 계층은 보나파르티즘에 경도되어 있거나 공화파였다. 루이 필리프 1세의 7월 왕정은 한줌 산업자본가와 도시 중산층의 지지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그 토대가 취약했다. 영국과 같이 선거권을 확대해야 한다는 건의가 몇 차례 있었으나 루이 필리프 1세와 그의 산업자본가 내각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지방으로 선거권을 확대하면 왕당파가 수권하여 반동 왕정이 복귀할 것이며, 노동자·서민 계급에게로 선거권을 확대하면 공화파가 수권하여 보나파르트 제정이 복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재산의 기준에 따른 제한선거가 계속되어 선거권을 보유한 자는 전 국민의 0.6%밖에 되지 않았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의 배경이 된 1832년 6월의 쿠데타는 이같은 현실에 분노한 공화파가 주도하고 왕당파가 동조한 폭동이었으나 이 때까지는 아직 즉위한지 2년밖에 되지 않은 루이 필리프 1세의 인기가 높아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48년 2월 혁명 때는 이러한 행운을 유지할 수 없었다. 루이 필리프 1세는 2월 혁명으로 인해 퇴위했지만, 그와 그의 산업자본가 내각의 예측은 정확했다. 혁명으로 인해 새로이 수립된 프랑스의 공화정은 채 3년을 버티지 못하고 보나파르티즘을 내세운 루이 나폴레옹에 의해 무너져 프랑스는 제정으로 이행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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