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는 세상]역사 뒤안길 사라진 대자보의 재등장…한때 열풍 아니길

1990년대 초반 대자보는 학교 곳곳에 넘쳐났다. 정문을 지나 오른편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 곁 게시판엔 밤사이 '안녕들하셨는지'를 묻는 대자보가 줄을 이었다.
시국에 대한 논의를 격정적으로 토로한 글부터 밤사이 '안녕하지 못하게' 어느 학우가 공안기관에 붙들려 갔다는 글, 상대에 대한 반박의 글 등 대자보에는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노동, 통일, 이념, 미군 등 대자보의 주제도 다양했다.
우리는 대자보를 줄여 '자보'라고 불렀다. 자보를 보면서 때론 용기없음을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공식 게시판 외에도 사회대, 공대, 인문대 등 단과대학 내 담벼락에도 자보는 넘쳐났다. 공안기관원이 늘 어딘가에 숨어 눈을 번뜩였다. 자보를 붙이는 '학우'들은 아침에 등교하는 또 다른 '학우'들을 위해 홍길동처럼 새벽을 틈타 자보를 걸었다. 반박에 재반박을 거치는 '릴레이 대자보'도 심심찮게 내걸려 등굣길 '학우'들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기도 했다.
대자보는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 새누리당이 부르짖는 '잃어버린 10년' 사이 대자보도 대학가에서 '잃어버린 10년'이 됐다. 민주화가 진행되며 대자보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게시판에는 '취업보장' '토익 몇백점 올려드립니다'는 광고가 자리를 대신했다. 아이와 산책을 위해 찾아간 집 주변 대학에서도 대자보는 없었다. 큼지막한 글씨로 시대를 걱정하는 '청년들의 목소리' 대자보는 역사 속으로 물러난 듯 했다.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듯 보였던 대자보가 재등장해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고려대에서 시작된 이후 유행처럼 각 대학으로 번지고 있다. 고려대 경영대 08학번 주현우씨가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주제로 붙인 대자보는 전국 대학에 '대자보 열풍'을 촉발시키고 있다.
내용은 도서관이라는 '골방'에서 청춘을 담보잡히는 것도 좋지만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요약되는 듯 하다. 철도민영화 파업에 따른 코레일의 수천명 직위해제와 국정원이라는 국가기관의 대선 불법개입, 밀양 송전탑 문제 등 현재 사회 이슈를 거론하며 대학생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솔직히 대학생들에게 '큰 기대'는 없었다. 최근 치러진 머니투데이 입사 과정에서 토론면접관으로 참가해 만난 지원자들 대다수는 학교를 8~9년씩 다니고 있었다. 사법시험과 공무원 준비로 휴학과 복학을 거듭한 '늙은 대학생'이 태반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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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송전탑' '경제민주화' 등을 놓고 벌어진 토론에서 모두 '말'은 잘했다. 하지만 사회를 바라보는 의식 관점에서 '2% 부족함'이 느껴졌다.
대자보 열풍이 한낱 유행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상대 주장을 대자보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얄팍한 영웅심도 없기를 바란다. 이번 대자보 이슈를 통해서 대학을 다니는 이유에 대해 느끼는 점이 있었으면 한다.
스펙은 조금 모자라도 좋다. '영혼없는 공무원'이면 몰라도 기업은 '영혼있는 젊은이'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