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l리포트]인적사항 유출에 보복 위험도…법안은 '국회 계류 중'

#변호사 A씨는 성범죄 피해자 B씨의 전화를 받았다. B씨는 가해자 C씨가 직접 전화를 해 합의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피해자의 전화번호를 가해자인 C씨가 알아내 직접 전화를 건 것. 심지어 형을 낮추기 위해 공탁금을 법원에 맡겼다는 통보도 받았다. 공탁을 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 개인정보를 알아야 한다. A씨는 증거로 제출한 서류에서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으로 추정하고 C씨의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C씨의 변호인은 "직원이 관련 서류를 복사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 같다"고 얼버무렸다.
#성범죄 피해를 당한 아동의 보호자 D씨는 가해자측에서 공탁통지서를 받았다. 여기에는 피해 아동의 이름은 물론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까지 적혀 있었다. 알고보니 가해자측이 공탁신청을 하자, 법원은 피해자의 부족한 정보를 채워넣으라며 보정권고서를 발급했고, 가해자측은 이를 이용해 주민센터에서 피해 아동의 주민등록초본을 발급 받은 것. D씨는 공탁 사실보다 집 주소까지 가해자가 알게 돼 보복을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형사공탁은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피고인이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정 금액의 돈을 법원에 맡기는 제도다. 형사사건에서 형을 낮추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피고인이 공탁을 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를 알아야 한다. 문제는 공탁 과정에서 피해자의 개인정보가 유출돼 2차 피해를 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또 합의 의사가 없는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가해자가 알아내 일방적으로 공탁을 하고, 공탁을 했다는 이유로 형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피해자 개인정보 유출…보복 위험까지
현재 형사공탁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피해자 개인정보 유출이 쉽다는 점이다. 피해자의 개인정보 유출은 곧 2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피고인이 공탁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탁 신청을 해야 한다. 이때 피해자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을 알아야 하는데 신청서에 관련 정보가 부족할 때 법원은 '보정권고서'를 낸다. 부족한 정보를 채워오라는 뜻이다. 피고인이 이 보정권고를 주민센터에 제출하면, 주민센터는 피해자의 주민등록초본을 발급해준다.
대법원은 "일반 변제공탁사건에서 공탁자가 피공탁자의 성명과 주민등록번호는 알고있지만 주소를 소명하는 서면을 첨부하지 않았을 때 공탁관은 보정권고를 하고, 주민센터에서 주민등록초본을 발급한다"고 설명했다. 주민등록법 제29조2항은 '관계 법령에 따른 소송·비송사건·경매목적 수행상 필요할 때' 본인이 아니라도 주민등록초본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문제는 피해자의 개인 정보가 유출되서는 안되는 사건인데도 공탁권고서를 이용해 주민등록초본 발급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이다. 대법원은 "성범죄 등 피해자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면 안되는 사건의 경우에는 실무상 보정 권고를 하지 않는다"면서도 "공탁자가 공탁원인 등에 형사사건에 관한 내용임을 적지 않으면 일반 변제공탁사건처럼 보정권고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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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의 변호사가 합의 또는 감형을 위해 관련 서류에 적힌 개인정보를 이용하기도 한다. 피해자국선전담변호사로 활동 중인 E 변호사는 "증거물로 진단서 등을 제출할 수 있는데 이런 서류에 피해자의 인적사항이 적혀있는 경우가 있다"며 "가끔 법원의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피고인의 변호사 측에서 직접 서류를 복사하기도 하는데, 이때 미리 사진을 찍어놓거나 전화번호를 외우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변호사가 규정을 어기고 개인정보를 유출했더라도 처벌방법이 마땅치 않다.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24조는 '수사 또는 재판을 담당하거나 관여하는 공무원 등은 피해자의 인적사항과 사진 등을 누설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수사를 한 경찰 등 공무원이 개인정보를 유출하면 처벌을 받지만, 변호사는 해당되지 않는다. E 변호사는 "변호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할 수 있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또 다른 소송을 하기는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공탁법 일부개정안 발의…'국회 계류중'
이같은 문제가 제기되자 대법원은 지난해 피해자의 개인정보 없이도 공탁을 할 수 있도록 규칙 개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공탁금을 찾아갈 때 당사자가 맞는지 확인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결국 규칙을 변경하지 못했다. 법무부의 협조 없이는 피해자들의 개인정보를 확보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대법원 규칙 변경이 실패하자 지난해 11월에는 우윤근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도로 피해자 인적사항을 모르더라도 형사공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공탁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됐다. 하지만 법안은 아직 국회 계류 중이다.
대법원은 "법안이 통과되면 공탁규칙과 예규 개정 등 후속 작업을 시행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결국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 전까지 관련 규정 개선은 힘들다는 설명이다.
대법원과 법무부 간의 의견차이도 제도 개선을 가로막는 이유 중 하나다. 법무부는 '수사중인 사건'도 형사공탁 특례적용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소 전 단계에서도 피해자의 피해회복 노력을 실현할 절차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은 이미 기소가 된 사건에 한해서만 형사공탁을 하도록 하고, 추후 확대를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재는 기소가 된 이후에만 형사공탁을 할 수 있다.
◇감형 위한 일방적 공탁…악용 가능성도
법이 개정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피해자의 인적정보 없이도 공탁을 할 수 있게 되면, 피고인이 피해자와의 합의 노력 없이 형을 낮추기 위해 공탁을 이용하는 등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물론 형사공탁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감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공탁에 의한 양형은 형법 제51조4호인 '범행 후의 정황'으로 반영된다. 형량에 무조건 반영돼야 한다는 규정이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지한 반성과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으로 재판부가 인정을 하면 정해진 양형 기준 안에서 감경이 가능하다. 판사의 판단에 따라 감경 여부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법안을 발의한 이윤근 의원 측은 "판단은 판사가 하는 것"이라며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공탁을 수령하지 않을 것이고, 판사는 양형을 결정할 때 이를 반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 변호사는 "과거보다는 나아졌지만 피해자가 합의를 원하지 않는데도 공탁을 했다는 이유로 감형을 받아 피해자에게 두 번 상처를 주는 사례가 아직도 있다"며 "피해자가 합의를 원하지 않을 때, 피해자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공탁을 했다면 판사가 이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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