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철거 앞둔 최고령 아파트...입주민들 "아직 살 만 한데" "때가 됐지"

[르포]철거 앞둔 최고령 아파트...입주민들 "아직 살 만 한데" "때가 됐지"

김성진 기자
2022.06.20 05:00
19일 오전 11시쯤 서울 서대문구 충정아파트 모습. 외벽의 녹색 페인트 빛깔이 바래서 노랗게 물들다 만 은행잎 같아 보인다. 서울시는 최근 이 건물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사진=김성진 기자
19일 오전 11시쯤 서울 서대문구 충정아파트 모습. 외벽의 녹색 페인트 빛깔이 바래서 노랗게 물들다 만 은행잎 같아 보인다. 서울시는 최근 이 건물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사진=김성진 기자

서울 충정로역 9번 출구를 나와 100m쯤 걸으면 5층짜리 낡은 아파트가 보인다. 외벽은 초록빛이 바랬고 군데군데 페인트칠 벗겨졌다. 물들다 만 은행잎 빛이었다.

19일 정오께 이 아파트 건물을 배경으로 이모씨(40)가 8세, 11세 아들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서울 구로구에서 왔다는 이씨는 "역사 공부 차원에서 아들들 사진을 하나 찍고 사연을 얘기해주려고 했다"고 했다.

경기 화성시에서 사는 배모씨(29)도 건물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었다. 배씨는 "외국에 가면 몇십년 된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도시의 옛날 모습을 보여주더라"라며 "우리나라도 오랜 건물을 조금씩 보존해 역사를 남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해당 아파트는 철거를 앞둔 '국내 최고령 아파트' 충정아파트다. 1937년 일제강점기에 준공돼 올해 나이는 85세다.

아파트가 있는 서울 충정로3가는 정비계획상 '마포로 5구역'으로 묶인다. 서울시는 지난 15일 제7 차 도시계획위원회를 열고 해당 구역 정비계획안을 수정 가결, 충정아파트를 철거하기로 결론 내렸다. 일대가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2008년 이래 주민들의 숙원이었던 개발이 이제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1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충정아파트 모습. 건물 한가운데 공터를 주변으로 입주민들이 화분, 장독대 등을 놓고 살고 있다./사진=김성진 기자
1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충정아파트 모습. 건물 한가운데 공터를 주변으로 입주민들이 화분, 장독대 등을 놓고 살고 있다./사진=김성진 기자

충정아파트는 한 층에 10세대씩 모두 50여세대가 있다. 입주민 중 60%는 세입자라고 한다. 주민들은 건물 공터 언저리에 나물을 말리고, 페트병을 오려 만든 화분을 놓고 상추를 키웠다.

낡을 대로 낡은 만큼 거주민들도 철거 결정을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충정아파트에서 만난 60대 거주민은 "건물 밖을 보면 지저분하지 않나"라며 "철거할 때가 됐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철거에 반대하는 주민도 살고 있다. 이모씨(64)는 "아파트 철거한 후 어디로 가 살 건지 정부가 대신 알아봐줄 것인가"라며 "아파트 외형만 안좋지 내부를 보면 아직 살만한 곳"이라 했다. 이씨는 이 아파트에 5년째 살고 있다. 한달 30만원씩 월세를 낸다. 간 질환을 앓지만 공사장 일용노동직으로 일한다.

익명을 요구한 4층 입주민도 "집이 좀 허름한 것만 빼면 지하철역과 시내가 가깝고 학교도 가까워 살만한 곳"이라며 "사는 사람 자존심도 있는데 안 내보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충정아파트 한 가운데 있는 연기굴뚝./사진=김성진 기자
충정아파트 한 가운데 있는 연기굴뚝./사진=김성진 기자

보존 가치가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아파트에 40여년 살았다는 65세 A씨는 "시원섭섭하다"면서도 "그래도 제일 오래된 아파트인데 남겨야 하지 않나"라 했다.

충정아파트에는 일제강점기 건물의 특징이 일부 남아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파트는 삼각형이고 가운데 중앙정원(중정)이 있다. 중정에는 회색 굴뚝이 세워져 있다. 과거 호텔로 쓰일 당시 연탄을 때면 연기가 방들을 덥힌 뒤 이 굴뚝으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 이곳 지하실에는 일부 서울 시민과 북한군이 숨어들었다고 한다. 북한군이 시민을 처형한 후 시신을 이곳에 숨긴 역사도 있다. 198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민주화운동 도중 경찰에게 쫓겨 이곳에 숨어들었다고 한다.

아파트는 이름과 쓰임이 여러번 바뀌었다. 처음에는 건립자 도요타 다네오(豊田種松)의 이름을 따 도요타 아파트였다. 6·25 전쟁 때는 유엔군 전용 호텔로 쓰였다가 1970년대 들어서 아파트로 분양됐다.

6·25 전쟁 때 외신 기자가 찍은 충정아파트 사진. 원래 충정로가 좁고 충정아파트가 두배 쯤 더 컸다. 1970년대 후반 충정로를 넓히면서 충정아파트 일부가 허물어졌다./사진=독자 제공
6·25 전쟁 때 외신 기자가 찍은 충정아파트 사진. 원래 충정로가 좁고 충정아파트가 두배 쯤 더 컸다. 1970년대 후반 충정로를 넓히면서 충정아파트 일부가 허물어졌다./사진=독자 제공

아파트 일부가 허물어지는 일도 있었다. 6·25 전쟁 때 사진을 보면 아파트 앞 충정로는 지금보다 좁았다. 1970년대 후반 충정로가 9차선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아파트는 3분의1 가량 가량이 헐렸다. 지금 충정로를 바라보는 방들은 8~9평이다. 다른 방들은 20~30평대다.

최근 이 건물은 문화 콘텐츠로 재생산됐다. 2020년 방영된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은 이곳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충정아파트는 사람이 괴물로 변해 쳐들어 온 오래된 아파트 역할을 톡톡히 했다. 드라마는 베트남 등 11개국 차트에서 1위를 했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