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발 총성에 쓰러진 독립운동 거목...그날의 진실은?[뉴스속오늘]

네 발 총성에 쓰러진 독립운동 거목...그날의 진실은?[뉴스속오늘]

박효주 기자
2023.06.26 05:30
백범 김구 선생과 암살범 안두희.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화면 갈무리
백범 김구 선생과 암살범 안두희.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화면 갈무리

1949년 6월 26일. 서울 종로의 한 2층 가옥에서 네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자 항일 무장투쟁 중심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쓰러졌다.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며 숱한 고비들을 넘기고 돌아온 고국에서 총에 맞으며 숨을 거둔 것이다.

범인은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당원이자 육군 포병사령부 소위였던 안두희. 그는 곧바로 붙잡혀 처벌까지 받았지만 이후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범행 동기와 배후 세력 등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무기징역 선고받았지만 1년 만에 풀려난 안두희

안두희는 군 조사에서 단독 범행을 주장했다. 그는 김구가 남북 협상을 통해서 정치 사회에 혼란을 주고 공산주의자들을 자극하고 찬동시키는 범죄를 저질러 참지 못해 죽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에서도 사건 발생 하루 만에 안두희 독단적 범행이며 배후는 없다고 밝혔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도 한독당 내분이라고 담화를 발표했다.

그런데 안두희는 큰 배후가 없다면 받기 어려운 특혜를 받게 된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석 달 만에 형기가 15년으로 감형됐다. 또 1년 뒤 6.25 전쟁이 반발하자 형 집행 정지 처분받고 군에 복귀했다.

특히 그는 수감생활을 하던 중에도 대위로 두 계급 특진했다. 당시 특진은 국방부 장관과 육군 총참모장 등 군 고위층 승인 없이 불가능한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그가 군으로부터 비호받는 신분이었음을 보여준 셈이다.

이승만 정권 몰락 이후 도망자 신세 전락
백범 암살범 안두희.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화면 갈무리
백범 암살범 안두희.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화면 갈무리

군에 복귀했던 안두희는 1953년 소령으로 전역했다. 휴전 이후 이어진 혼란기를 틈타 부를 손에 쥐기도 했다. 포병 시절 연을 쌓은 장교들을 통해 군납 사업을 벌여 크게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960년 4·19일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진 것이다. 이승만 정부하에서 그를 비호해줬다는 의혹이 있던 만큼 정권이 바뀌자 진상규명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안두희는 사업을 접고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단체에 붙잡혀 검찰에 넘겨지기도 했지만, 당시 검찰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형사처벌 불가 판정을 내렸다. 일사부재리는 확정판결이 내려진 어떠한 사건이나 법률에 대해 두 번 이상 심리·재판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말한다.

국민 여론은 들끓었고 이후 안두희는 잠행하고 신분을 숨기고 살아갔다.

"배후 있다" 언급했지만 끝내 밝히지 않아

안두희는 범행 43년만인 1992년 자신의 단독 범행이라는 말을 뒤집고 배후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암살 배후로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을 지목했다. 하지만 그다음 날 모두 거짓이 이라며 입장을 바꿨다.

이후 2년이 지난 1994년 안두희는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일각에서는 배후 세력이 누구인지 밝혀질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했지만 그는 실어증을 이유로 증인선서를 하지 않았다. 또 끝날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결국 자체 조사를 한 조사위원회는 김구 암살 사건을 면밀하게 준비하고 모의 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로 결론 내렸다.

당시 김구가 정계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동시에 김구와 한독당까지 친공세력으로 몰아붙여 극우 반공 체제를 강화하려 했다는 분석이다.

그 배후로 군부를 지목했으며 이승만 개입 의혹에 대해서는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미국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암살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시민 손에 죽음 맞이한 안두희
지난해 6월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백범 김구 선생 제73주기 추모식에서 유가족들이 헌화를 마친 뒤 묵념하고 있다. /사진=뉴스1
지난해 6월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백범 김구 선생 제73주기 추모식에서 유가족들이 헌화를 마친 뒤 묵념하고 있다. /사진=뉴스1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음에도 검찰에서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자 안두희를 향한 사적 제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첫 사적 제재가 발생한 것은 1965년 12월이다. 강원 양구군에서 29세 청년 곽태영씨로부터 신체 주요 부위가 칼에 찔리는 습격을 당했다.

이후 1987년 3월 안두희는 서울 마포구청에서 백범기념사업회 소속 권중희씨가 휘두른 각목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갔다. 같은 해 7월 한 회사원에게도 각목으로 맞았다.

여러 차례 사적 제재받던 안두희는 결국 1996년 10월 23일 생을 마감했다. 버스를 운전하던 시민 박기서씨가 휘두른 '정의봉'에 살해당했다. 박씨는 범행 직후 경찰에 자수하면서 "정의는 살아 있다"고 외쳤다.

대법원은 1997년 11월 "살해는 어떤 수단이나 목적이든 정당화할 수 없다"며 징역 3년을 확정했다. 살인죄의 최저 형량(5년 이상)보다 낮았다. 박씨는 이듬해인 1998년 3·1절 특사로 사면 돼 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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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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