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1월21일. 지금의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하는 대학 입학 학력고사를 하루 앞두고 시험지가 유출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1982년부터 치러진 대입 학력고사는 가고 싶은 학교를 먼저 지원한 뒤 시험을 치렀다. 학생들은 대입을 위해 1년에 시험을 3번까지 치를 수 있었는데, 전기대에 먼저 지원한 뒤 떨어지면, 후기대, 여기서 또 떨어지면 다시 전문대에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시험은 각 대학에서 치러졌다.
문제가 된 건 후기 대입 학력고사였다. 시험이 24시간도 채 남지 않은 예비 소집일 오후, 시험이 갑자기 취소돼 혼란이 빚어졌다.
경찰에 사건이 신고된 건 이날 오전 9시 20분이었다. 경기 부천의 한 대학교에서 보관 중이던 시험지가 사라졌다는 신고 전화가 걸려 왔다. 경찰 조사 결과, 과목별 시험지가 한 부씩 사라진 상태였다.

이에 교육부에서는 부랴부랴 전국 각 대학에서 보관 중인 문제지를 긴급 회수해 파기했고, 다음날인 1월 22일로 예정됐던 후기 대입 학력고사를 2월 10일로 연기했다. 사건 바로 다음 날인 22일 당시 윤형섭 교육부 장관이 경질됐다.
27만 명이 넘는 수험생들은 그야말로 비상 상태였다. 잔뜩 긴장한 채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뜻밖의 시험 연기에 헛걸음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 수험생들이 몰려 고향에 돌아갈 차편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시험 출제위원들의 연금 기간도 길어졌다. 이들은 22일 학력고사 당일 4교시 시험 시작과 함께 풀려날 예정이었지만 시험지가 도난당하면서 20일을 더 붙잡혀 다시 새롭게 문제를 출제해야 했다.
시험지 도난으로 모든 학사 일정도 덩달아 꼬여버렸다. 홀가분하게 맞을 수 있었던 그해 2월 2일~5일 설 연휴는 수험생도, 출제위원에게도 지옥의 명절이 됐다. 수험생들은 시험을 앞두고 다시 공부에 매진해야 했고, 출제위원들은 새 문제 출제를 위해 골몰해야 했다.
후기대 입시 관계자들과 이후 진행되는 전문대학 입시 관계자들도 미뤄진 일정에 맞춰 급히 입학 사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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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난 사건이 발생한 대학교에 시험지가 배송된 건 시험 이틀 전인 1월 20일 점심 무렵이었다. 경기 성남의 한 인쇄소에서 시험지 15상자가 경비과장 조씨가 운전하는 차량에 실려 출발했고, 운송 과정에는 교육부 감독관, 경찰이 함께했다.
시험지가 담긴 상자는 본관 1층 교무처 안쪽 전산실로 옮겨졌다. 경찰 감독하에 학교 경비원, 교무처 직원들이 상자를 쌓고 전지로 이중 포장을 했다. 전산실 문을 잠그고 바깥에 봉인지까지 붙여 보안을 유지했다.
그날 저녁 8시 40분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는 건물 출입구 5곳을 쇠사슬로 걸어 잠가 건물을 폐쇄했다. 이후 건물은 학교 경비원 두 사람이 지켰다. 새벽 1시 순찰 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문제는 다음 날 오전 7시쯤 발생했다.
순찰을 하던 경비원 정씨가 교무처 출입처 위쪽 유리창이 깨진 것을 발견했다. 전산실 내부는 깨끗했으나 전산실 문을 봉인해둔 종이도, 문제지 상자를 이중 포장했던 전지도 찢어진 상태였다. 시험지 상자는 날카로운 뭔가로 뚫은 듯 구멍이 나 있었다.
경찰 감식 결과 전산실 안에선 지문 6개와 족적 2개가 발견됐지만, 이는 전날 시험지를 옮겼던 직원들 것이었고, CC(폐쇄회로)TV가 보편화되기 전인데다 현장 증거가 남아있지 않아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경찰은 전산실 내부가 깨끗했던 만큼 경찰은 시험지가 전산실에 있다는 걸 아는, 학교 사정에 빠삭한 내부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경찰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주목한 건 최초 신고자이자 야간 당직을 맡았던 경비원 정씨였다. 여러 정황이 정씨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씨는 야간 순찰 후 정문 수위실에서 잠들었지만, 전화교환실에서 잠들었다고 거짓 진술했고, 정씨가 뒷산을 두 번이나 올라갔다 내려오는 걸 목격한 사람도 있었다. 정씨의 직속상관인 경비과장 조씨도 '정씨가 지인의 딸을 돕는다며 원서를 이 학교에 접수해줬다'고 제보했다.
경찰은 이를 바탕으로 정씨를 조사했고, 결국 정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의 딸이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정씨가 언급한 지인의 딸은 이미 합격권이었던 데다 이 학교에는 장학금 제도가 없어 그의 진술 내용에 의문이 제기됐다.
정씨가 훔친 시험지를 해당 수험생에게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고, 정씨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시험지를 훔친 뒤 바로 불태워버렸다더니 뒷산에서 찢어버렸다, 변기에 버렸다며 계속 말을 바꿨다.
이에 경찰은 공범 여부를 집중적으로 수사하기 시작했다. 정씨의 배후로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은 정씨에 대해 제보했던 그의 직속상관인 경비과장 조씨였다.
조씨는 사건 전날 시험지 운송 차량을 운전했고, 정씨에게 "순찰 열심히 안 한 게 문제될 수 있다"며 전화교환실에서 잠들었다고 거짓 진술하게 한 인물이었다. 조씨는 경비 책임자였던 만큼 마스터키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의 집중 조사를 받던 조씨가 28일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사건은 다시 한번 미궁에 빠졌다. 정씨는 조씨의 사망 소식을 접한 뒤 조씨가 시켜서 한 일이라고 진술을 번복하면서 경찰은 수사에 난항을 겪었다.
결국 경찰은 '조씨가 정씨를 시켜 저지른 범행'이라고 결론지었지만,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검찰은 기소를 포기했고, 이 사건은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다.
후기 대입 학력고사 시험지 도난 사건의 진범은 밝혀지지 못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문제 출제, 시험지 배송 방식 등이 크게 달라졌다.
국립교육평가원(1998년 이후 국립교육과정평가원)은 1993년부터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정규 문제 외에 똑같은 난이도의 문제지를 추가 출제하도록 했다.
또한 1993학년도 대입 학력고사부터는 시험지를 시험 당일 새벽에 고사장으로 이송하게 됐다. 이는 1994학년도부터 시행된 수능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수능 체제 이후 수능 문제지가 유출되거나 도난당한 적은 없다. 다만 2010년 한 검정고시생이 경기 성남시 인쇄공장에서 수능 문제를 훔치려다가 경찰에 붙잡히는 소동이 인 적은 있다.
1992년 후기 대입 학력고사가 연기된 이후, 달라진 수능 체제에서도 한 차례 수능이 연기된 바 있다. 2017년 11월 15일 경북 포항에서 발생한 규모 5.4 강진이 발생하면서다. 당시 교육부는 수험생 안전을 위해 그달 16일 치러질 예정이었던 수능을 23일로 일주일 연기한 바 있다. 재난재해 등 예상치 못한 일로 수능이 미뤄진 것은 1994학년도 수능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