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구를 잡기 위해 구속은 어느 정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은 한국 야구계에서 오랜 시간 당연하게 여겨졌다. 힘이 들어가면 제구가 날린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 좋은 제구를 위해선 일정한 투구폼과 많은 반복 훈련만이 정답에 가까운 해결책으로도 여겨졌다. 그 말대로면 구속을 포기했을 때 제구는 어느 정도 늘어야 했다. 하지만 꼭 그 관계가 반비례하는 건 아니었다. 또 일정한 투구폼을 지닌 투수 역시 꼭 빼어난 제구를 자랑하진 않았다.
이 부분과 관련해 최근 열린 미국야구연구학회(SABR)에서 흥미로운 연구 보고서가 발행됐다. 미국 유명 스포츠 트레이닝 센터로 알려진 '드라이브라인'의 최신 연구(The Interaction of Biomechanics and Command)에 따르면 제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단순 반복 훈련'이 아닌 '가변성(Variability·상황에 따라 변화를 줄 수 있는 능력)'이다. 드라이브라인은 이 보고서로 올해 SABR에서 '마이크 마샬 투수 생체역학 연구상'을 받았다.
'좋은 제구를 위해선 구속을 포기해야 한다'는 만연한 한국 야구계 편견을 무너트렸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구속과 제구는 '트레이드 오프(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압도적인 구속이 제구의 실수까지 덮어주는 '보험'이며, 제구는 기계적인 반복이 아닌 '조정 능력'의 산물이라고 정의한다. 제구력을 키우기 위해 구속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드라이브라인은 연구 시작에 앞서 "커맨드(포수가 요구하는 지점에 정확히 던지는 능력)가 중요하다는 건 널리 알려졌지만, 정량화된 정보가 부족했다. 지금까지 공개된 거의 모든 커맨드 정보는 결과를 기반으로 했다. 그 결과 커맨드 연구는 구속 연구보다 20년이나 뒤처졌다"고 현실을 직시했다.
이어 "(그동안 알려진) 커맨드 관련 주요 훈련 방식은 단순히 더 많이 던지고 올바른 지점에 정확히 집중해 던지는 것이었다. 코치마다 좋은 메커니즘이 무엇인지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일관된 말이 투수들에게 반복적인 메커니즘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구체적으로 뭘 반복해야 하는지 설명은 없었다. 이것이 우리가 연구로 해결하고자 하는 부분"이라고 주제를 명확히 밝혔다.

좋은 제구의 기준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구속이 각각 다른 우완 투수 3명 카일 헨드릭스(37·LA 에인절스), 다르빗슈 유(40·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벤 조이스(26·LA 에인절스)가 사례로 소개됐다. 헨드릭스는 시속 140㎞ 초반의 느린 공을 지녔지만, 리그 최고의 제구력을 갖춘 투수다. 반대로 조이스는 제구는 뛰어나지 않지만, 시속 164㎞의 빠른 공을 던지는 젊은 투수다. 다르빗슈는 빠른 구속과 준수한 제구, 모두 갖춘 투수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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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라인은 투수가 의도한 지점과 실제 공이 꽂힌 지점과 거리를 측정해 데이터를 쌓았다. 이들의 릴리스 포인트(공을 놓는 위치), 투구 메커니즘도 함께 측정했다. 그 결과 흔히 생각했던 '기계처럼 일정한 폼을 가진 선수'가 제구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번스타인의 망치'다. 숙련된 대장장이는 망치를 휘두르는 궤적이 매번 미세하게 다르지만, 최종 타격 지점은 항상 정확하다.
몸이 실시간으로 오차를 감지하고 궤적을 수정하기 때문이다. 투수도 마찬가지다. 보고서는 투구 동작 초기에 발생하는 미세한 균형의 어긋난 부분을 본능적으로 수정해 최종 목적지에 공을 꽂아 넣는 것이 좋은 제구의 본질이라 말한다. 데이터에 따르면, 제구가 뛰어난 투수들은 공을 놓기 직전 근육의 회전 속도를 투구마다 미세하게 조절한다. 반복 훈련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는 반복 훈련을 통해 일정한 투구폼을 만드는 데만 집중한다면, 미국은 오차를 수정하는 감각을 키워야 한다는 데 포커스를 맞췄다.
드라이브라인은 연구 결과를 통해 훈련법도 단순히 스트라이크 존에 많이 던지는 것이 아닌 공의 무게를 다르게 하거나, 마운드의 경사를 바꿔 던지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제구력을 늘리는 훈련에도 조금 더 체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소리다. 물론 한국 야구만 뒤처졌다고 애써 자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좋은 제구를 위한 훈련은 현대 야구의 정점에 서 있는 미국 메이저리그도 여전히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주제다.

최근 반복되는 국제대회 부진 속에 한국 야구계도 변화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 변화의 방향성을 두고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거기엔 막연히 경험에 의존한 현장의 지도방식도 한몫한다. 천편일률적인 현장의 지도방식에 아쉬움을 나타내는 목소리도 있었다.
KBO 선수들을 여럿 키워낸 한 트레이너는 스타뉴스에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훈련 방법은 불펜에서 투수에게 '팔이 낮다', '템포가 너무 끊긴다', '스트라이드 폭이 너무 작다'는 등 지적하는 데서 그친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어 "구속을 올리기 위해 공을 많이 던지게 하고, 많이 뛰어 근육을 늘리는 것과 같다. 미국과 메이저리그는 선수 개인별 특성에 맞게 목적성을 가진 훈련을 한다. 예를 들어 내야수들의 타구 판단을 키우기 위해 우리나라는 펑고를 한다. 하지만 미국은 타구 판단 자체를 키우기 위한 드릴 운동을 따로 한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좋은 제구력을 갖추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물음에 속 시원하게 답하는 현장 관계자는 없었다. 어떤 이는 많이 던져봐야 안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제구도 재능이라고 했다. 이번 드라이브라인의 보고서에 따르면 현장 지도자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답변도 틀리진 않았다. 좋은 제구력을 위해선 타고난 감각도 반복된 훈련도 필요했다.
다만 같은 결론에 다다르기 위해 미국에서는 데이터를 통해 문제를 정량화하고 제구도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개선할 수 있는 영역임을 증명해냈다는 것이 달랐다. 블랙박스 같던 제구의 비밀을 데이터로 풀어낸 저들처럼 이젠 한국야구도 선수에게 무엇이 잘못됐는지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고, 방향을 제시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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