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화끈한 패배' 책임 안지나
전진 또 전진. 후퇴 또 후퇴. 요즘 서울 외환시장에서 벌어지는 환율전투는 정말 허망하다. 전진하는 '약(弱)달러' 세력은 엄청난 달러매도 물량을 쏟아내고, 이를 막아내는 외환당국은 방어선을 계속 뒤로 물리고 있다. 8일 오랜만에 달러값이 반등했지만 대세는 사실 정해져 있다. 막강한 화력 앞에 정신없이 소총을 쏘아본들 실탄만 축낼 뿐이다. 그 실탄 값으로 지난달에만 100억달러가 넘게 들었다. 이젠 '군자금'마저 동이나 결국 돈을 더 찍기로 했다. 승패가 정해진 전투. 그래도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당국의 수고가 안쓰럽다.
하지만 전황을 이렇게 만든데는 당국의 잘못이 크다. 떨어지는 환율을 억지로 부여잡고 있다가 기진할 즈음 단칼에 당하는 형국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한걸음씩 물러나야 할 싸움을 미련하게 버티다가 당하는 꼴이 마치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이다. 국방비(달러매입비용)를 탕진하고 수 많은 병사(기업)들이 나가 떨어졌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나라를 위해 원화강세를 막겠다는 일념으로 후회없는 공격전을 펼쳤던 외환당국의 '국방장관'과 '사단장'은 지금도 건재하다. 그래서 발권력 얘기도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장에 맞서기 위해 발권력을 들먹인 작전이 성공한 예는 없다. '투신 부실'의 씨앗인 '12-12 증시대책'이 대표적인 경우. 1989년 당시 정부는 투신사들에게 돈을 찍어서 대 줄테니 증시가 안정될 때까지 무제한 주식을 사들이라고 지시했다. 꺼질 수 밖에 없는 '거품 주가'를 막겠다고 투신사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운 결과는 참담했다. 후유증도 심각했지만 역시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반성과 문책이 없으니 똑같은 잘못은 반복된다. 지난 2001년 9월 종합주가지수 500대가 무참히 깨질 때도 정부는 발권력 운운하고, 주식투자 손실보전상품을 내놓겠다고 우겼지만 모든 시도는 허사로 끝났다.
억지 환율이 어떤 참변을 낳는지는 IMF 사태때 이미 그 위력을 실감했다. YS 정부는 경상수지 적자와 외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데도 '원화약세'를 용인하지 않았다. 달러당 800원대의 '원고(高) 시대'. 그 환상적인 환율거품 위에서 국민소득 1만달러를 만들고, OECD에 가입하고, 원없이 해외소비를 즐겼다. 그리고 화끈하게 당했다. '원고'와 '원저(低)'만 다를 뿐 전투의 전개과정은 지금과 완전히 닮은 꼴이다.
한가지 다른 점이 더 있다면 예전에는 우리가 '돈잔치'를 즐겼지만 지금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느긋하게 '환차익'을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나마 환율전투가 이쯤에서 벌어진 게 불행중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더 곪아서 터졌다면 그 폭발력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환율은 시장이 정한다. 그러나 정부가 안정적으로 관리할 의무도 있다. 그 관리란 환율변동의 폭과 속도를 적절하게 조절해 경제에 적응할 여유를 주는 일이다. 그것은 시장의 대세를 읽고 따라가며 하는 것이지 무모하게 대세에 맞서는 게 아니다. 얼마 전에는 대통령이 이와 같은 관리의무를 강조하기도 했다. 아무리 '적'이 강하다지만 얼마나 상황이 다급했기에 대통령까지 나섰을까. 이쯤 되면 환율관리에 실패한 당국자는 당연히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