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먹고 잘릴 각오로 실사하라"

"욕먹고 잘릴 각오로 실사하라"

박준식 기자
2009.09.11 10:35

김범수 언스트앤영 TAS본부 상무

이 기사는 08월31일(17:15) 머니투데이가 만든프로페셔널 정보 서비스 'thebell'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언스트앤영(옛 한영회계법인) TAS 본부의 김범수 상무는 기업 출신이다. 대학 졸업 후 LG전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외환위기 직전까지 꼬박 6년 반을 '고객만족(CS)'을 위해 살았다.

그래서인지 회계법인으로 전직한 이후에도 김 상무가 갖는 마음가짐은 전문직 종사자라기 보단 서비스맨에 가깝다. 마주하고 있으면 태도나 말씨가 오랜 시간 부단히 다듬어진 것이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김 상무가 생각하는 서비스란 고객의 구미에만 맞추려는 아첨과는 거리가 멀다. 때론 고객에게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조언자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2년 전 김 상무가 동남아의 한 국가에 진행한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사건이다.

당시 글로벌 기업을 대리해 언스트앤영에 주어진 현지 타깃 기업 실사기한은 사흘에 불과했다. 7명의 팀원들과 함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밤을 세워 업무를 진행했지만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나 개발도상국 기업의 회계 작성 기준과 재고 관리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아 완벽을 기할 수 없는 게 문제였다.

부족한 실사 기간에도 김 상무팀은 10건에 달하는 관련 이슈를 제기했다. 그는 "이대론 도저히 안되겠단 생각이 들어서 인수 완료시한을 다소 늦추더라도 제기된 문제인 우발채무를 가격협상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매출이 수십조 원대인 글로벌 고객사가 고작 수백억 원짜리 기업을 사는 딜이어서 언스트앤영에서는 검토를 조기에 마무리 짓고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고객을 위한 일인가 고민한 끝에 욕먹고 잘릴 각오로 검토할 문제에 대해서 협상할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거래를 일사천리로 진행하려던 대기업이 피인수 기업이 아니라 실사를 위해 고용한 어드바이저로부터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당장 내부에선 동요가 일었다. 황당한 건 김 상무팀을 고용한 고객사 전략부서 담당자들이었다.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관성이 생기는 대기업 특성상 프로젝트 지연 책임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었다.

김 상무에겐 이 당시가 "짧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덮어놓고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식으로 가자니 직업윤리가 허락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고집을 부리자니 믿어준 클라이언트가 곤란할 수 있었다. "대체 뭘 위해 고객이나 회사에서 욕을 먹어가며 일해야 하나"라며 고민한 때다.

하지만 그 번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격협상을 하면서 제기된 문제점을 피인수기업에서 조정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우발채무의 문제는 인수 가격 하락으로도 이어졌다. 합리적이면서 밀도 높은 문제제기가 피인수 기업의 '자진납세'를 이끈 셈이다.

잠시나마 무엇이 최선의 길인지에 대해서 고민하던 김 상무도 부담을 훌훌 털었다. 아니 오히려 고객사는 끝까지 원칙을 지킨 언스트앤영을 진짜 파트너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김 상무팀은 그 이후로 다른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맡게 됐다.

최근까지 김 상무는 대우조선해양과 진세조선, STX중공업, LG마이크론, 삼보컴퓨터, 대한ST, 썬스타특수정밀 등의 실사 프로젝트를 도맡았다. 국내에서 일어나는 중공업 관련 용역의 절반은 그의 손을 거치는 셈이다. 회계법인이 아닌 기업 출신이지만 김 상무가 언스트앤영에 입사한 지 10년도 안돼 파트너에 오른 이유는 고객들로부터 원칙을 실행하는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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