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없는 재정위기에 관료주의 부정부패… 특유 낙천성에 기대감만 여전

아테네공항을 빠져나와 고속도로에 들어서면 길가엔 입간판들이 즐비하다. 군데 군데가 빈칸이다. 입간판에 광고를 넣을 기업들이 없다. 삼성 엘지 한화 등 한국 업체들만 고속도로 입간판을 점령했다. 예전엔 카지노와 호텔, 렌터카 업체들의 광고가 자리했던 곳이다.
아테네 시내 중심엔 신다그마 광장이 위치해 있다. 한달전 총파업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당시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신다그마광장 위편 국회의사당 초소엔 화염병에 그을린 자국이 남아있다. 유리창도 깨져 있어 당시 격렬했던 시위 현장을 말해준다.

신다그마광장을 뒤로 하고 골목길로 접어들면 젊은이들의 거리가 나타난다. 온갖 패스트패션의 잡화점부터 명품숍까지 즐비하다. 한 골목 뒤로 들어서면 그리스 전통 제품과 기념품을 파는 플라카 지역의 재래 시장이 펼쳐진다. 식당마다 호객행위를 하는 인심좋은 그리스 아저씨들의 왁자지껄함이 들려온다. 시장통에선 흥정의 목소리도 높다.
유로존 재정위기의 근원지인 그리스에 대한 첫 인상은 암울했다. 높은 실업률과 해답이 없어 보이는 재정위기에 여기저기엔 정부에 대한 분풀이 낙서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사람 속으로 들어가 본 그리스는 조금 다르다. 특유의 낙천성으로 이번 위기도 쉽게 극복할 것이란 묘한 기대감이 있다. 왜 재정위기의 책임을 우리에게 묻느냐는 '항의'까지 나온다. 금모으기라도 해서 재정위기를 탈출해야 겠다는 긴박감보다는 우선 사람이 행복한게 우선이란 남유럽의 정취다. 묘책이 나오면 좋겠지만 그리스 재정위기가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짙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꼬일대로 꼬인 그리스=신다그마 광장 뒷켠엔 총파업 당시 적어 놓은 낙서들이 여전하다. IMF 때문에 그리스 시민들이 모두 감옥살이를 할 것이란 풍자부터 '해피 뉴 이어' 대신 '해피 뉴 피어(Fear, 공포)'라는 씁쓸한 새해 인사도 눈에 띈다. 시내 곳곳엔 폐업한 빈 상가가 즐비하다. 우범지대에 속하는 오모니아 지역엔 대형 호텔이 영업을 중단한 채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빈 상가마다 낙서가 가득차 있다. 지하철도 이런 낙서가 빼곡하다. 전 도시가 우범지대인듯한 착각에 빠진다. 낙서를 지우거나 관리할 인력이 없는 것인지, 관리를 포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빈상가는 항상 개들의 차지다. 그리스인들은 개와 고양이를 각별히 여겨 길거리 주인없는 개들에게도 정부가 예방접종을 놔주고 먹이도 꼬박꼬박 준다. 재정위기로 나라의 곳간은 비었지만 개를 관리할 예산은 남아 있다.
피레우스항과 올림픽경기장을 잇는 지하철의 모나스트리아키역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모르는 공사가 한창이다. 지하철 공사 때문에 한쪽 레일을 활용해 교대로 지하철이 오가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이마저도 주말엔 부분 파업에 들어가 지하철 이용이 영 불편하다. 꼬일대로 꼬인 관료주의와 공공부문의 비효율성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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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젊은이들, 하락하는 자산가치=그리스 실업률은 약 20%에 달한다. 세계 최초의 대학이랄 수 있는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하는 아테네대학 학생들도 졸업후 갈 곳이 없다. 유럽 각지와 북미 지역으로 떠나는 젊은이들이 많아 경제활동인구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부동산 가치는 급락을 거듭하고 있다. 중산층이 많이 거주하는 아테네 인근 아파트 100㎡의 시세는 최근 10만유로까지 하락했다. 1년전만해도 15만유로를 육박하던 매물이다. 그리스 정부가 재정위기 타개를 위해 부동산 특별세를 부과하면서 급매물이 쏟아져 부동산 가격이 급락했다. 주식시장에선 주가지수가 600포인트까지 떨어져 10분의 1토막으로 줄어들었다.
자산가치라 하락하면서 바닥에 근접했다는 평가는 많지만 정작 이에 투자할 여력이 있는 현지인들은 별로 없다. 중동이나 북유럽의 부호들이 관심을 가질 뿐이다. 하지만 워낙 복잡한 부동산 관련 제도 탓에 이마저 쉽지 않다. 새로운 돈이 들어오기 어려운 구조다.
◇합리적인 소비했을 뿐, 왜 고통을 지나=그리스인들의 항변 중 하나는 '재정위기의 책임이 없다'는 데에 있다. 그리스는 2000년에 유로존에 편입되면서 자금조달금리가 8%대에서 1%대로 급격히 낮아졌다. 값싼 금리에 자금을 빌릴 수 있으니 합리적인 소비를 했을 뿐이란 항변이다.

신다그마광장에서 만난 일리아스씨는 "이제와서 재정위기를 책임을 지고 긴축을 하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그리스가 유로존에 통합되면서 버블이 생기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고 이제와서 그 책임을 그리스에 묻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궤변으로도 들리지만 그리스인의 정서다. '돈을 벌면 우선 쓰고, 남의 돈도 갖다 쓴다'는 그리스식 낙천성이 묻어있는 항변이다.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빌리지 못한다면 그리스의 재정위기는 단기간에 해결되긴 어려워 보이는 대목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