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이끌 4300조 성장판 잡아라]<1-1>금융의 미래를 묻다
#"중국, 브라질, 베트남…내가 해외 펀드에 투자하기만 하면 죄다 '박살'이 났어. 더 이상 해외 펀드는 듣기도 싫어." 60대 투자자 A씨는 증권사 직원이 해외펀드 가입을 권유하면 얘기도 듣기 전에 손사래를 친다.
많은 투자자들에게 해외 펀드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잘나간다'는 펀드에 뭉칫돈을 넣었다가 반토막이 난 사례가 많아서다. 국내 저금리·저성장으로 글로벌 투자에 대한 필요성은 늘어나고 있지만 쉽사리 해외 펀드에 손이 가지 않는다.

반면 노후 준비를 위한 연금 자산 등이 늘어나면서 투자자금은 국내 시장만으로는 감당을 못할 정도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자산운용업계가 운용하는 연금·펀드규모는 매년 연 10%가량 성장해 2030년엔 4300조원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국내 자산운용사들이 해외자산을 포함해 전반적인 운용 역량을 키우지 못하면 이 자금들은 고스란히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은 운용 자금을 대부분 해외 금융기관들에 맡기고 있다. 국내 자산운용회사들은 해외 주식 투자 자금을 최근에 들어서야 일부 위탁받고 있는데 2개사, 총 5000만달러에 불과하다. 자산운용사의 대형화·글로벌화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당장 떨어진 발등의 불이다.
◇투자에 목마른 운용사… "앉은뱅이 해외투자? 국내투자 탈피"
자산운용사들 사이에서도 투자자의 신뢰를 잃어버린 것은 운용 능력이 부족했던 탓'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2007년 해외 주식형 펀드에 대한 비과세 혜택이 시행되며 해외 투자 경험이 미숙했던 자산운용사에도 조 단위의 막대한 돈이 흘러들어왔다. 대박을 위해 선뜻 돈을 건낸 투자자들과 투자 성향과 위험관리보다는 '좋은게 좋은 거다'란 식으로 펀드를 판매, 운용한 금융투자업계가 빚어낸 비극이었다.
묻지마 투자→운용 실패→투자심리 악화의 악순환 고리를 투자자 맞춤형 상품 개발→안정적인 수익률 달성→해외 투자에 대한 관심 확대라는 선순환으로 돌려야 한다. 이를 위해 '자산운용사들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투자'가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힌다.

머니투데이가 국내 자산운용사 임원 20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본받아야 할 글로벌 자산운용사로 블랙록, 피델리티, 캐피탈그룹, BNY멜론, 디멘셔널 펀드 어드바이저(DFA), JP모건 등이 꼽혔다. 이들 자산운용사의 공통점은 적극적인 M&A(인수·합병)를 통한 체력 강화, 일관된 운용 철학, 인력에 대한 존중의 문화 등이 있다는 점이다.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투자자 성향에 맞는 금융 상품들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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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국내 자산운용사들의 경우 단기 성과에 급급해 장기적인 성장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특히 국내 자산운용사들은 은행, 보험 등의 계열사로 독립성을 갖추지 못해 투자 계획을 세우는데 모회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즉 해외진출, 우수한 인력 확보, IT 인프라 구축에 대한 투자 등에 인색해 개별 운용사만의 색깔을 갖기 어렵게 된다.
한 자산운용사 임원은 "자리에 앉아서 블룸버그 단말기를 보면서 투자하는 건 개인투자자들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며 "해외 출장을 보내다보면 출장비만 연간 7억~8억원은 가볍게 드는데 그걸 할 수 있는 자산운용사가 없다"고 말했다.
인력 개발·지원에 인색하다보니 글로벌 IB(투자은행)에서 일하는 우수한 한국인들이 한국 자산운용사 취업을 기피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인력 이동도 잦아 투자 노하우가 쌓이지 않고 펀드 수익률도 들쑥날쑥해진다. 해외 자산운용사 근무 경력이 있는 한 매니저는 "해외 IB들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우수한 인력 확보에 혈안이 돼 있고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며 "그동안 국내 자산운용사들은 내수 시장 위주로 성장하다보니 글로벌 인력에 대한 필요성도 크게 느끼지 못했고 데려와도 활용을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금융의 미래, 외국에 내주면 안된다" 제도적 도움 필요
상황이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해외 투자의 필요성이 점점 커지면서 대형 자산운용사를 중심으로 글로벌화의 움직임은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3월 기준 국내운용사 중 해외에 진출한 운용사는 16개사이며 진출 사례는 총38건으로 집계된다. 현지법인 형태의 해외진출은 2010년 12건에서 3월 현재 26건으로 소폭이나마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2003년 국내 최초로 해외운용법인인 홍콩에 진출한 이후 현지법인이 11개로 가장 많은 국가에 진출해있다. 삼성자산운용도 2007년 홍콩법인 설립에 이어 지난해 삼성생명 뉴욕과 런던법인을 인수하면서 현지법인을 3곳으로 확충했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꾸준히 베트남 법인을 유지하면서 운용 노하우를 축적, 현재 베트남 내 운용 규모가 한손안에 꼽힐 정도다.

이들 자산운용사들의 해외법인은 당장의 손익구조에 연연하기 보다는 10년 내외의 오랜기간 투자를 통해 지금은 글로벌 자금을 받아들이는 등 입지를 다지고 있다. 이정호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법인 대표는 "아시아 상품에 관해서는 최고의 전문 운용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10년이상 전략을 세우고 실천해왔다"며 "해외운용 인력에도 지속적으로 투자해 지금은 글로벌 평가기관에서도 인정받는 상품을 운용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국민연금, KIC(한국투자공사) 등 굵직한 기관투자자들의 지원 등 정책적 도움도 필요하다. 대형 기관투자자에는 전세계 자산운용사들의 정보가 모이는데, 이들의 장점, 성장전략 등을 국내 자산운용사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선제적인 자금 집행으로 국내 자산운용사들에게 해외 자금 운용 기회를 주고 더 나아가 해외 자금의 국내 유입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홍의석 삼성자산운용 홍콩법인장은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은 해외로 확장하는데 앞서 국내 기관으로부터 자금을 유치해 기초체력을 보강한다"며 "정책적으로 자산운용사들이 해외에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어느정도는 만들어 주고 그 이후에 잘 가꾸고 키워 나가는게 운용사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