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대한민국경제올림피아드]
그린전장은 품질, 납품 실적, 작업공정, 환경미화 등을 평가한 종합평가에서 항상 다른 업체들보다 앞섰다. 그런데도 강부장은 새로이 오더가 들어오면 그린전장엔 가공비가 낮은 하찮은 아이템만 배정해 주고는 했다. 정사장도 만족할 만하게 오더를 받아본 적이 딱 한 번 있기는 했다. 정사장은 최사장이 정황을 알아차리고 특별히 지시를 했으리라 짐작을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강부장이 자꾸 생색을 냈다. 다른 업체들은 강부장에게 제공하는 뇌물을 부업으로 작업하는 서브 공임을 낮게 책정해 주고 조립도 암암리에 상당 부분을 부업으로 내돌리는 것으로 충당을 했다. 다른 업체들이 납기를 제대로 못 맞추고 허둥거리는 것을 보고 있자면 서로 경쟁관계인데도 불구하고 정사장은 자신이 애가 달았다. 아무리 오더를 많이 받아도 조립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헛일이다. 오더를 많이 준 대가로 뇌물을 달라고 끊임없이 지분거리던 강부장이 어느 날 전화를 걸어 왔다
“정사장님, 급한 부탁이 있어요. 내가 와이프 모르게 돈 삼백만원을 써야할 일이 있는데 어떻게 좀 빌릴 수 있을까 해서요. 며칠 뒤에 갚아 드릴게요. 너무 급해서 그러니 꼭 좀 부탁합시다.”
괜한 태클을 걸어 수시로 괴롭히던 강부장은 돈을 빌려간 이후 한 없이 너그러워졌다. 또 오더가 들어오면 좋은 아이템을 우선 빼주겠다고 열심히 일만 하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강부장은 돈을 가져간 지 몇 달이 지나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동안 모진의 관리직 직원들에게 명절이나 생일 또는 애경사에 성의껏 신경을 써왔다. 강부장에게는 더 신경을 썼다. 뇌물을 안 먹였을 뿐이지 인사는 거르지 않았다. 삼백만원은 스스로 뇌물을 바친 것도 아니다. 정사장은 부가세를 납부하는 달에 부가세를 낼 돈이 부족하다며 빌려준 돈을 돌려달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이구, 깜박 잊어버리고 있었지 뭡니까.”
강부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이틀 뒤 그는 돈을 돌려주면서 더럽게 재수 없다는 제스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후 정사장은 대책 없는 자신의 객기를 뼈저리게 후회했었다.
“사장님들, 어서 한 묶음씩 집어 드세요. 우리 사장님 말씀처럼 좋고 나쁜 것은 없을 겁니다. 사장님들끼리 상의해서 서로 아이템을 바꾸어도 괜찮습니다. 각 업체마다 익숙한 분야가 있으니까요. 송림은 트렁크 룸하고 씨트 쪽을 많이 했었지요? 경원은 도어 하고 루프 쪽 전문이고, 그린은 리모컨 하고......, 그런데 어느 아이템이 어느 업체로 갈지 모르겠어요.”
강부장이 조금 전 최사장이 했던 말을 다시 읊어대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움직이는 사람이 없자 강부장은 두루마리를 각자 앞으로 한 뭉치씩 밀어 놓는다.
정사장은 앞에 놓인 두루마리를 확 밀쳐내고 싶지만 마음뿐이다. 이 일을 그만 둔다면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마땅한 일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취직을 할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오십이 넘은 나이에 직장을 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보험을 들어달라거나 강매할 물건을 들고 찾아와서 곤혹스럽게 하던 지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마저도 그만 둔다면 실업자가 되기 십상이다. 사업하다가 망했다고 측은해 하는 얼굴들과 은근히 고소해 할 시선들도 엉켜든다. 직원들과 집에서 부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줌마들이 요즘 들어 더 뺀질거린다고 투덜거리던 김과장의 말을 떠올린다. 그래 그만 두는 거야. 간신히 최저 임금만 맞춰 주다보니 직원들 부리기가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자주 충돌이 일어났다. 스트라이크까지 갈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나이가 많아 다른 회사에 들어 갈 수 없는 오십이 넘은 아줌마들과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회사 근처에 사는 젊은 여자들이다. 그들도 다른 일자리를 얻기가 녹녹하지는 않다. 직원들에게 사업장을 폐쇄하겠다고 통보할 생각을 하면서 잠시 통쾌함을 맛본다. 그러나 잠깐이다. 다 큰 딸들을 생각한다. 실업자 아비는 딸들 결혼에 알게 모르게 부담이 될 것이다. 사업장을 정리하려고 해도 상당한 손실이 따른다. 누군가에게 권리금을 받고 인계를 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설비와 비품 등 모든 것을 폐기 처분해야 한다. 이 상황에선 권리금까지 주고 인수를 받을 사람도 없고 모진에서 허락할 리도 없다. 그래, 그냥 이대로 포기 할 수는 없어. 그럼 수지타산은 어떻게 맞추지. 혼자서 다짐하고 반문하는 정사장은 암담하기만 하다. 모진에서 휘둘리며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서원 밑으로 들어가 2차 업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욕망이 또 솟구친다. 너무 큰 모험이다. 동서가 서원에 간부로 건재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연고 없이 1차나 2차가 되려고 꾀하다가 도산한 업체가 몇 있었다. 성공한 예가 없었다. 동서는 모진 밑에서 몇 년 경력을 쌓고 나면 서원 밑으로 직접 들어올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었다. 간부들의 알력 싸움에서 밀려난 동서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동서가 서원에 간부로 근무한다고 해도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대안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2차 업체가 되려면 현재의 공장보다 몇 배는 큰 규모의 건물로 이주를 해야 하고 컨베이어를 설치해야 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무엇보다 부담이 큰 것은 덩치가 큰 메인이나 풀로아를 조립하면서 결산일에 깔려 있을 반제품에 대한 운영자금이다. 동서가 원망스럽다. 동서가 사업을 하라고 적극 권하지만 않았다면 천직으로 생각했던 공무원 생활로 별 어려움 없이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서의 권유에 솔깃해서 뛰어든 자신의 판단이 잘못이었다. 돌이켜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결국은 이대로 견뎌보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계속하려면 오더를 하나라도 더 받아야 한다.
“사장님, 오늘 아침에 인터넷에 보니까 한국자동차 또 파업 들어간다고 뜨더군요. 노조의 요구 조건이 만만치 않아 또 어떤 폭풍을 몰고 오나 했는데 파업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런 날벼락이 떨어지는군요.”
홍사장이 불쑥 던지는 말이다.
“걔네들도 이번에는 극단적으로 치닫지 못 할 거예요. 내일모래 찬반 투표에 들어가고 가결되면 7월 1일부터 파업한다고 하더군요. 서원에선 부결되는 걸로 예측하고 있는데 가결된다고 해도 길게 갈 수는 없지요. 작금의 경제 상황에 파업이 웬 말이냐고 여론이 몰아대는데 그들이라고 어쩌겠어요. 결국 적당한 선에서 물러서겠지요.”
최사장이 에둘러 얼버무리자 홍사장의 얼굴에 냉소가 흐른다. 홍사장은 팔짱을 끼고 몸을 뒤로 제처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있는 그의 표정이 복잡하게 얽힌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침묵한다.
“다들 너무 힘들지요. 여러분들은 그래도 밑에서 조이는 데는 없지요. 나는 여러분 눈치 봐야지 서원 눈치 봐야지, 가운데서 샌드위치 돼서 숨도 제대로 안 나옵니다. 서원 사장님한테 3차 업체에서 가공비가 낮다고 오더를 안 받으려고 한다고 하소연 했더니 중국으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중국에서 계속해서 불량을 내서 문제가 심각한데 모진이 가서 한다면 불량 없이 잘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러면 중국에 있는 업체도 모진에 흡수시켜주고, 우리 모진에만 오더를 주겠다고 가공비를 20% 하향 조정하자고......,”
“저는 그만두겠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아이템 반납해야지요. 오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홍사장이 벌떡 일어나 그 말을 남기고 휘적휘적 걸어 나간다. 정사장은 뒤따라 일어서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낸다. 최사장은 날선 눈으로 홍사장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그냥 두시오. 작년에 부도가 났던 부평산업 밑에서 3차로 있던 기업에 주면 되지요. 그 사람들 벌써부터 기웃거렸으니까 부르면 반가워할 거요. 아, 지금 전화를 해봐야겠군.”
통화를 하고 있는 최사장의 얼굴이 벙글거린다. 태주전장이라는 곳에서 공장을 아직 정리하지 않았고 그대로 있다며 당장이라도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나서는 것 같다. 태주의 유사장에게 즉시 모진으로 들어오라고 하며 휴대폰의 폴더를 덮는 최사장의 얼굴이 득의로 가득 찬다. 박사장과 김사장이 도면 뭉치를 들고 슬며시 일어선다. 정사장도 따라서 도면을 들고 일어선다. 밖으로 나와서도 여느 때와 달리 모두 말이 없다. 자재과로 가서 각자 도면을 펼쳐서 아이템을 확인하고 샘플 작업할 자재와 와이어를 받는다.
정사장은 짐칸에 자재와 와이어를 싣고 운전석으로 들어가 시동을 건다. 새삼 가슴이 벌렁거린다. 다리도 후들거린다. 여러 차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모진에서 빠져나와 도로로 진입한다.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도 브레이크를 밟을 생각을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신호를 받은 우측 도로의 차들이 요란하게 클랙슨을 울려댄다. 강변도로로 진입한다.
조립을 가정 부업으로 전환하면 인건비가 반으로 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환하는데 시일도 꽤 걸리고, 가정으로 일일이 배달을 하자면 배달 기사도 따로 두어야 한다. 물류창고로 납품을 할 전담기사까지 두 사람을 더 채용해야 한다. 가정에서 작업을 한 제품은 불량이 많아 검사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불량을 수정하는 인력도 계산해야 한다. 불량으로 손실되는 자재도 만만치 않다. 작업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 되지 않아 납기를 맞추느라 버둥거릴 일도 벌써부터 걱정이다.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 날엔 하루에 두세 번씩 납품을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홍사장처럼 만세를 부르지 못하고 오더를 받아 온 것에 회의가 오기 시작한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요동을 친다. 인영의 목소리가 급하다. 서브물이 거의 소진되어 가는데 김과장은 서원에서 와이어 출고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정사장은 부업을 하고 있는 집으로 가서 서브물을 걷어 회사로 간다.
조림팀은 쉬고 있다. 정사장은 서브물을 갖다 주면서 서둘러 작업을 하라고 지시한다.
정사장은 도어와 트렁크 룸, 패키트 라이어 세 가지 아이템을 받았다.
“갑자기 웬 오더에요. 아이템도 좋은 걸 받아왔네.”
정사장이 물류창고까지 납품을 해야 한다고 말하자 반색을 하던 인영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진다. 인영이 곧바로 얼굴 표정을 밝게 고치곤 아이들을 생각해서 참고 견뎌보자고 한다. 정사장은 인영의 말에 모진에 가서 그대로 반납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털어버린다. 짐짓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인영의 대범함이 고맙고 든든하다. 재정상태 때문에 사무실 직원과 자재담당 직원을 내보내고 그들이 하던 일을 인영이 혼자서 해낸 지도 3년이 지났다.
정사장은 김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 받은 아이템의 조립판을 서원에서 받아 오라고 이른다. 작업자는 없고 빈 걸대만 몇 개가 놓여 있는 서브실로 도면과 와이어와 자재를 가지고 간다. 패키트 라이어는 회로도 몇 개 되지 않고 선이 짧다. 그린에서 많이 해 온 아이템이다. 같은 아이템이라도 차종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지만 기본 모형은 비슷하다. 패키트 라이어는 제쳐 두고 도어 하고 룸의 와이어를 서브도의 배열 순서에 따라 걸대에 걸어 놓는다. 트렁크 룸은 회로 수는 그다지 많지 않은데 길이가 길다. 가정에서 빨래 건조대에 걸면 바닥으로 많이 늘어진다. 그래도 회로가 많지 않아 와이어끼리 엉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도어는 길이가 길지는 않은데 회로수가 상당히 많다. 빨래 건조대 두 개에 걸기도 벅차다. 두 개에 나누어 걸면 왔다갔다 이동을 하면서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궁리를 끝에 가지 선으로 들어갈 선이 짧은 와이어를 먼저 순서대로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하우징의 정해진 자리에 끼우고 반대쪽도 끼워본다. 그리고 길이가 긴 선만 걸대에 걸어서 두 단계로 작업을 해본다. 괜찮은 방법이다. 가정에서 작업을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서브를 하나씩 완성을 시켜서 검사실로 가져간다. 검사원에게 불량을 수정하라고 하고 모진에서 받아온 회로 검사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깔고 서브만 된 상태로 회로 검사를 해 본다. 우선 도어부터 각 잭에 하우징을 꽂고 연결한다. 삐삐, 불량이라는 신호다. 도면대로 잘 삽입했는데 불량이라니. 꼼꼼하게 살펴본다. 회로 하나가 공간으로 두어야 할 옆자리에 삽입되었다. 하우징 키를 찾아 하우징 속의 락을 들어 올려 체결된 단자를 살짝 밀어내고 와이어를 잡아당겨서 빼낸다. 와이어를 제자리에 찾아 꽂고 다시 회로 검사기의 잭에 하우징을 연결하자 컴퓨터가 찰칵 소리를 내며 라벨을 뱉어낸다.
김과장이 조립판을 들고 들어온다. 김과장은 서원에서 리모컨 와이어 중 한 가지가 압착불량이 나서 압착된 단자를 다 잘라 내고 다시 찍어 줘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트렁크 룸은 배선의 길이가 길긴 해도 조립판에 ㄷ 자를 거꾸로 놓은 것처럼 설계되어 있다. 도어는 조립판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잡고 가지선을 아래위로 나열해서 설계되어 있다. 도어하고 트렁크 룸의 조립판은 둘 다 가로 160cm 세로 65cm로 사이즈가 같다. 조립판의 받침대를 가벼운 앵글로 조립해주면 가정집에 들여 놓는데 별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정사장은 조립판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은 뒤 각 잭에 서브물의 하우징을 꽂고 와이어를 정렬시킨 후 접착테이프를 가져다 조립을 한다. 트렁크 룸은 꺽어지는 모서리에서 테이프를 감다가 손이 멈칫거려지고 도어는 가지선의 분기를 잡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조립까지 해놓고 나니까 주저앉고 싶다. 탐내던 아이템을 받았는데도 자꾸 기분이 가라앉는다. 일단 밀고 나가기로 결정한 이상 힘을 내자고 마음을 추스른다. 김과장과 함께 나머지도 서브를 해서 조립까지 완성시키고 저녁에 납품을 하라고 이른다. 새로 들어온 아이템은 조립과 서브를 모두 가정 부업으로 진행할 거라고 하자 김과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이 주변에서 조립판을 집에 들여 놓고 일할 공간이 있는 집들이 있겠어요?”
근처에 서민아파트가 많아 인력조달이 용이할 거라는 생각에 공장으로 쓸 만한 건물을 물색하던 중 볼링장이었던 건물이 방치되어 있어 싸게 임대할 수 있었다. “조금 멀리 있는 집이라도 배달을 해주고 내일부터는 직원들도 계속 잔업을 시키고 주말에도 특근을 시키도록 하게”
하루의 업무가 마감되어 간다. 정사장은 힘을 내보려는 의지와 달리 자꾸 기분이 가라앉는다.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다. 대작을 할 마땅한 사람을 생각해 본다. 이럴 땐 친구나 친지들보다는 같은 마음인 업체 오너들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전화를 하자 박사장은 친구가 부친상을 당했다고 하고 김사장도 다른 급한 볼일이 있다고 한다. 홍사장은 전화도 받지 않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