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 재판 유감

최태원 회장 재판 유감

양영권 기자
2013.09.30 06:45

[우리가 보는세상]재판부 최태원 최재원 형제에 인신공격성 발언

10여년 전 법조를 취재할 때다. 국가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해 피살된 남편을 대신해 부인이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 승소했다. 부인은 "남편의 명예가 회복됐다"며 기자들 앞에서 연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법원의 판결은 정부가 남편에 대해 보호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일 뿐 남편의 명예와는 상관 었다. 하지만 남편 사망 후 주변의 수군거림에도 자신을 드러낼 수 없어 어떤 말도 하지 못했던 부인은 재판부가 그간의 사정을 들어 준 것만으로도 '명예회복이 됐다'고 느꼈던 것이다.

재판은 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억울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나쁜 짓을 한 사람을 뉘우치게 하는 것도 법원이 할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판결이었다.

지난 27일 열린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최재원 수석부회장에 대한 선고공판. 2시간 동안 이어진 재판부의 발언에는 인신공격이 난무했다. "최태원, 최재원은 한마디로 거지다" "김원홍이는 허황되고, 탐욕스럽고, 도박성도 있고, 허무맹랑하고, 기만·술수·자기과시에 능하고, 도저히 신뢰하지 못할 사람이다"라는 원색적인 표현이 동원됐다.

앞서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원홍 전 SK해운 고문이 전격 송환됐다. 하지만 재판부는 "실체적 진실 발견에 무슨 증언을 하든 필요 없다"는 말로 최 회장 측의 증인 신청을 끝내 기각했다. 재판부가 과거 공판에서 김 전 고문에 대해 "중요한 증거 방법"이라고 했던 데 대해서는 "사정 변경이 생겼다"며 말을 바꿨다.

선고 공판뿐 아니라 항소심 진행 중 재판부는 최 회장에 대해 지속적으로 유죄를 시사하고, 증인 채택에 부정적인 입장을 거듭 밝혔다. 재판이 편견 없는 백지 상태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먼저 유죄라는 확신을 갖고 그에 맞는 증거를 취사선택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최 회장을 비롯한 주요 피고인과 회사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진술을 번복한 것에 대해 재판부는 사법부를 경시하는 태도로 느꼈을 수 있다. 그래서 따끔한 '본보기'를 보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반면 법원의 판결이 실체적 진실이라 하더라도 사실상 변론이 제약당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입장에서는 '우리가 전략을 잘못 짰기 때문'이라는 자책을 할 망정 수긍은 힘들었을 듯 싶다. 선고가 끝나고 최재원 부회장이 격앙된 목소리로 "저는 횡령을 지시하지 않았다. 검찰 수사 때에서야 이 일을 알게 됐다"고 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일부에서는 이번 재판을 '재벌에게 더 이상 온정은 없다'는 법원의 입장을 확인시켜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유전무죄'라는 악습을 깨는데 법원이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재판 과정을 지켜본 이들이 "난다 긴다 하는 변호사들을 선임한 재벌 총수도 재판에서 할 말을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범부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까 걱정이 드는 것은 비단 기자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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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권 기자

머니투데이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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