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선의 컬처톡톡]호모 워킹, 520km로 내일을 걷는 그들

[황인선의 컬처톡톡]호모 워킹, 520km로 내일을 걷는 그들

황인선 문화마케팅평론가
2014.07.09 05:40

'이들이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 할 그 친구들인가!'

화요일 오후 1시. 약간 땡볕, 바람 무. 제주 종달초등학교 교정에 배낭을 정렬하고 느티나무 아래에 모여 쉬고 있는 그들은 내 상식대로라면 홍대 앞이나 도서관 아니면 동아리 활동이나 문화체험 해외여행, 연수를 가 있어야 했다. 낯익은 듯 낯설지만 어쨌든 눈빛이 밝아 보여서 일단은 좋다. 올해로 17회인 그 제약회사 국토 대장정의 참가 경쟁률은 70:1. 꽤 높다.

그렇게 모인 144명 대학생들이 17박 총 520km 대장정을 시작하는 제주도성산 일출봉에서 나는 첫날 출정식 리허설을 지켜보고 다음 날은 오후 반나절을 같이 걸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걷다보니 발바닥이 따갑고 모자와 옷에 소금기가 하얗다. 힘들다고 하면 차에 타라고 할까봐 찍소리 없이 걸었다. 나는 하루로 끝나지만 그들은 그날부터 하루 30km 이상을 17일간 걷는다. 20대가 젊다지만 4일 정도 지나면 젖산 누적으로 다리가 붓고 발바닥은 망치로 맞은 것 같고 물집이 잡히고 거기에 또 물집이 잡힌다. 다리가 후들거려 정신이 멍해지면서 앞사람 뒷다리만 보고 걷지만 이건 오늘만 참으면 끝나는 악몽이 아니다. 내일 내 몸을 자신할 수도 없다. 17일이 그렇게 긴 시간인 줄 무섭게 깨닫는다.

대원 중 여자가 절반인 72명이다. '아, 몰라. 끝내.' 주저앉고 싶지만 내 인생도 그렇게 주저앉을까 무서워 그럴 수 없다. 후회, 놀러 간 친구들 생각에 억울한 마음, 에어컨과 팥빙수, 바다, 뒤따라오는 앰뷸런스에 잠깐이나마 타고 싶다는 약함···. 사이렌 유혹들이 춤을 출 그 때부터 대장정 꽃은 화려하게(?) 피기 시작한다. 내 몸에 숨은 마력의 힘이 옆에 걷는 친구들의 것과 합쳐 폭발한다. 네가 "아자" 선창하고 내가 "아자" 후창하고 대장정 노래가 떼로 퍼지면 서로의 눈에 눈물어린 결기가 뿜어져 나온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하루 또 하루, 520km를 걷는다. 1300리 길. 17박 18일간 마실 물, 씻을 물은 제한되고 72명 여대생들에게 중요한 화장실과 탈의실도 열악하고 개인시간도 별로 주어지지 않는다. 모 젊은 문화평론가는 요즘 기업형 체험 프로그램은 모험에서 위험이 소거된 껍데기라고 지적했다지만 이건 모험에 가깝다.

그들과 같이 걷다가 '걷는다는 게 뭘까?' 생각이 들었다. 걸음의 촉으로 수행한 틱낫한 스님, 순례자들도 생각나고 한비야도 생각나고 제주 올레길을 걸으면서 눈물이 났다는 어느 중년도 생각났다. 올레길, 둘레길, 남도 길, 아리랑 고개 길, 인생 길···. 그래. 우리는 걷는다. 땅이 열어 준 길을 걷고 어떤 노선을 걷고, 사람 길짐승 길을 걷고, 같이 걷지만 결국 혼자 걷고, 밝은 데서도 걷고 어두운 데서도 걷고, 억지로도 걷고 기꺼이도 걷고, 승자로 걷고 패잔병으로 걷고···. 그렇게 걸음으로 인생이 만들어지고 인생이 결국 끝없는 작은 걸음들임을 확인한다. 걷기가 끝나는 날 우리는, 아마도 대부분 안녕하지 않았을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니 걸음은 내 현존을 즉자적으로 대하는 순간이고 대지와 만나는 위대한 면회 순간이고 동행의 시간, 자연이 얼마나 난폭한지도 알 수 있는 시간이다. 죽은 자는 걷지 못한다.

10분 쉬는 시간에 두 번째 참가한다는 여대생 진행요원에게 물었다. "왜 참가했어?", 그은 얼굴이라 더 하얀 치아 사이로 짤막한 답이 나온다. "좋았어요.", "뭐가?", "자신감이요.", "그게 뭐가 좋은데?", "제 힘으로 뭔가를 끝까지 마친다는 건 중요하니까요.", "한번 했으면 됐지.", "이젠 선배로 후배들과 걷고 싶었습니다." 꽤 간결하게 답하던 그녀는 "네" 하면서 어디론가 쌩 달려간다. 17박의 시간, 520km의 거리와 17년 간 매해 144명으로 만들어진 호모워킹(Homo Walking) 공동체. 거긴 여자도 남자도 없다. 우유 빛깔, 꿀벅지, 꽃남도 없다. 20:80 파레토 법칙도 적용되지 않는다.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오를 때 공연스레 창으로 아래를 봤다. '어딘가 걷고 있겠지. 곧 장마라는데··· 그렇게 걸어 인생 대장정도 완주하길 바란다. 나도 내 대장정을 완주하길 나에게 바랄 테니. 걷다가 어느 덧 밤이 되고 문득 하늘을 보면 달이 빛나고 별이 그렇게 큰 것도 보게 될 거다. 어두워서 더 밝은 그들을. 너희 고통에 한국의 내일이 있을 거라고 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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