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대부자의 귀환

클라크 켄트가 안경을 벗자 슈퍼맨이 됐다.
엇박자 금리정책으로 지적받던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확실히 변했다. 코로나19 위기 전면에서 방파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10년 전 금융위기 후 처음으로 임시 금통위를 열어 기준금리를 0.5%p 떨어뜨린 게 시발점이다. 금융 약소국 한국이 할 수 있는 최대치 '빅컷'을 단행했다.
그는 이후 곧바로 대형 증권사 유동성이 문제되자 무제한 RP(환매조건부채권) 매입에도 나섰다. 3주간 한은은 국채매입 확대와 산금채 단순매입 등 유동성 공급조치를 연속해 쏟아냈다.
뭐가 그를 변하게 만든 걸까.

사실 한은 금통위는 모두가 기대했던 2월 금리인하를 배신했다. 대구·경북에서만 코로나19 확진자가 1500명을 돌파할 무렵이다.
역병은 신천지와 함께 무섭게 확산되고 있었다. 한은은 그러나 "코로나 장기화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고 둘러댔고, 소극적이란 비판이 몰아쳤다.
이 총재는 어땠을까.
그는 통화정책 효과를 높이려 했다는 얘기가 간부들 사이에서 들린다. 인하는 해야겠는데 시점이 고민이었다는 얘기다.
당시 총재는 간부들에게 경기 바닥을 예측하자고 했다 한다. 바닥이란 확신이 들었을 때를 노려 금리를 내려야 경기반등 주역이 될 수 있다고 기대한 셈이다.
지난 얘기지만 코로나19가 사드나 메르스처럼 단기간에 종식되고 그 이전에 금리를 내렸다면 '조커'를 미리 썼다는 비난에 시달릴 수 있었다.
몇 번 쓸 수 없는 정책카드라면 확진자 숫자가 정점을 찍었을 때 꺼내야 효과를 크게 볼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는 의미다.

이주열식 사고는 유럽이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에서 사망자가 하루 수백명씩 나오자 정책 결정 속도가 터보로 변속됐다.
2월 말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코로나19는 전 유럽으로 퍼졌다. 3월 초 프랑스와 독일, 스페인까지 차례로 하루 확진자 1000명을 돌파하자 세계 경제가 흔들렸다.
독자들의 PICK!
코로나19는 동북아시아만의 문제가 아닌 게 확인됐다. 확산속도는 대륙이나 위도 한계를 넘어서 전세계로 뻗을 기세가 분명했다. 팬데믹이란 걸 확신한 것이다.
그 사이 총재 생각을 뒤흔들 보고서가 올려졌단 얘기도 나온다.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 경제 파장에 관한 예상이 담겼다고 한다.
미국 뉴욕과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 주요 해외거점에 한은은 사무소를 두고 있다. 한국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항들에 관해 총재는 실시간 보고를 받는다.
한은 관계자는 "총재가 가진 인식의 변화는 유럽 확산을 기점으로 느껴졌다"며 "2월 금통위 이후와 임시 금통위 사이에 많은 논의가 이뤄졌다"고 귀띔했다.

중앙은행은 '최종대부자'다. 은행들의 은행이란 얘기다. 코로나19 사태는 한은의 역할을 되새기게 한다.
시장 관전자에 머물던 한은은 확실히 달라졌다. 마치 미국 연준(FED)처럼 적극적인 조치를 내놓고 있다. 코스피가 1400까지 밀리던 때 증권사들을 구했다.
무제한 RP공급 선언은 파격적이었다. ELS(주가연계채권) 마진콜에 시달리던 한국투자증권 등은 달러가 없어 무너질 위기였다. 폭탄을 막아준 셈이다.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은 이러쿵 저러쿵 해도 환율 급등을 막은 긴밀한 공조였다. 기획재정부와 함께 미국 연준과 한미동맹 프로토콜의 굳건함을 내보였다.
이번 주에는 시장이 외면하던 국채를 살려냈다. 매입량 증대를 현실화해 2~3차 추가경정예산에서 우려되는 국고채 범람 우려를 미리 잠재운 것이다.
하지만 본 게임은 이제부터다. 실적이 망가지고 현금이 마른 민간 기업들을 구해야 한다. 한은이 사상 처음으로 회사채까지 사들일 수 있을까.
법을 바꿔야 하는 문제이지만 SPV(특수목적회사)를 만들어 이른바 쿠션(?)을 먹이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무튼 한은이 이렇게 적극적인 건 불행 중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