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정거래위원회가 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삼성전자 등 한국 휴대폰·셋톱박스 업체에 '갑질'을 한 혐의를 포착, 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브로드컴이 휴대폰 등에 들어가는 통신칩을 공급하면서 장기계약을 강요하고, 이를 통해 경쟁 통신칩 업체의 사업 기회를 박탈했다는 등의 혐의다. 혐의가 사실로 밝혀질 경우 대규모 과징금 부과와 검찰 고발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6일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2월 서울 강남구 양재동에 위치한 브로드컴 코리아를 방문해 현장조사를 진행했다. 미국에 본사를 둔 브로드컴은 스마트폰, TV 셋톱박스, 케이블 모뎀 등 기기에 사용되는 통신칩을 공급하는 글로벌 업체다.
공정위는 브로드컴이 통신칩 시장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활용해 한국 휴대폰, 셋톱박스 업체에 부당하게 불리한 '갑질 계약'을 맺었는지 의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휴대폰 부문에서는 브로드컴이 삼성전자 등에 통신칩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장기계약'을 맺도록 해 삼성전자가 타사 통신칩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다는 혐의가 불거졌다. 이 경우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통신칩 제조사들은 경쟁에서 배제되고, 브로드컴은 안정적으로 시장지배력을 유지·강화할 수 있다. 삼성전자로선 스마트폰 제조를 위해 브로드컴의 통신칩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부당한 계약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평가다.
셋톱박스 부문에서는 브로드컴이 한국 셋톱박스 업체와 거래할 때 적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점권 조항' 등에 위법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독점권 조항은 셋톱박스 제조업체에 "브로드컴의 통신칩을 공급받고 싶다면 경쟁사 제품을 구매해선 안된다"는 조건을 거는 것이다. 이미 이런 문제가 유럽에서 불거졌고 지난 2019년 유럽연합(EU) 경쟁당국은 브로드컴에 "독점권 조항을 3년간 중단하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브로드컴의 불공정 거래 혐의가 사실로 밝혀지면 공정위는 공정거래법상 금지된 '경쟁사업자 배제 행위', '배타조건부 거래 행위' 등을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김형배 전 공정위 상임위원(현 공정거래조정원장)의 저서 '공정거래법의 이론과 실제'에 따르면 배타조건부 거래 행위는 '거래 상대방이 자신의 경쟁사업자와 거래하지 아니할 것을 조건으로 거래상대방과 거래하는 행위'다.
공정위가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것은 2019년 즈음으로 알려졌다 . 조성욱 공정위원장은 2019년 말 취임 100일을 기념해 개최한 기자간담회에서 "2020년 1분기 정보통신기술(ICT) 전담팀에 '반도체 분과'를 신설해 5G(5세대 이동통신) 전환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반도체 제조사의 경쟁사 시장진입 봉쇄 행위 등을 집중 감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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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위 내 태스크포스(TF) 조직인 ICT 전담팀은 현재 △반도체 △지식재산권 △디지털광고 △O2O(Online to Offline) 플랫폼 △앱마켓 등 5개 분과로 나눠 운영되고 있다. 각 분과가 해당 분야 핵심 사건을 처리하는 구조인데, 브로드컴 사건의 경우 반도체 분과의 영역에 해당한다.
공정위가 브로드컴의 위법성을 입증해 제재에 나설 경우 대규모 과징금 부과와 검찰 고발이 예상된다. IT 업계는 이번 사건이 2016년 공정위가 '역대 최고 과징금'을 부과한 퀄컴 사건과 비교될 수 있다고 본다. 당시 공정위는 퀄컴이 반도체 시장에서 시장지배력을 남용한 혐의를 적발해 과징금 1조300억원을 부과했다.
일각에서는 공정위가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브로드컴이 동의의결을 신청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동의의결은 기업의 자진시정·피해구제를 전제로 위법성을 가리지 않고 사건을 신속하게 종결하는 제도다. 실제 최근 미국 경쟁당국인 연방거래위원회(FTC)는 브로드컴의 유사한 위법 혐의에 대해 동의명령(consent order)를 적용하기로 했다. 동의명령은 한국의 동의의결과 비슷한 제도다.
한편 브로드컴 사안과 관련해 공정위 관계자는 "사건과 관련해서는 말할 수 없다"며 말을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