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쓰고 진저리치게 달콤한 한편의 서정시, '폭싹 속았수다'

한껏 쓰고 진저리치게 달콤한 한편의 서정시, '폭싹 속았수다'

정명화(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5.04.01 10:24

믿고 보는 작가 감독 배우들의 종합선물세트에 3월이 행복했다

사진제공=넷플릭스
사진제공=넷플릭스

호도독, 풀잎 위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내밀하면서도, 어느새 촉촉하게 온몸을 적셔오는 드라마가 올 봄 브라운관에 훈풍을 불러왔다. 3월 초 바닷바람을 머금은 봄 이야기로 첫 포문을 연 ‘폭싹 속았수다’는 춘삼월 한달동안 보는 이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며 긴 삶의 서사를 들려주었다.

매 장면이 순수문학 소설의 한 장을 펼친 듯한 감성이 물씬한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의 사시사철을 배경으로 ‘요망진’ 여자아이 ‘애순’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70여년의 세월을 관통하며 근대사를 온 몸으로 살아낸 인물과 가족들의 서사를 그린 최근작이라는 점에서 ‘파친코’를 연상시키기도 하나, 작품의 분위기는 좀 더 유머러스하고 해학적이다.

주인공들이 맞이하는 갈림길과 그들의 내면적 갈등은 굵직한 시대적 사건과 함께 굴러가지만, ‘폭싹’은 타 시대물에 비해 사랑, 부부애, 모성, 가족애 등 정서적이고 개인적인 서사에 집중했다. 제주의 푸른 바다와 유채꽃이 만발한 들판을 배경으로, 삶이 주는 모진 시련을 이겨내고 치유하며 천천히, 그러나 꺽이지 않는 의지로 나아가는 삼대의 평범하지만 찬란했던 이야기가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전하는 작품이다.

1960년대 제주도. 하고싶은 것도 욕심도 많은 애순(아이유)와 오매불망 일편단심 ‘관식(박보검)은 어린시절부터 줄곧 함께 하며 풋풋한 첫사랑도 나눈다. 해녀인 엄마 광례(염혜란)가 ‘숨병’으로 세상을 뜨고 천애고아가 된 애순의 곁을 묵묵히 지킨 관식. 뭍으로 나가 대학에 가고, 시인이 되고 싶던 애순은 첫사랑의 도피가 일으킨 파장 탓에 꿈을 접고 관식과 혼인을 한다. 아들의 앞길을 막았다는 원망으로 구박하는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에 어린 딸을 데리고 무작정 분가한 애순과 관식.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궁핍한 생활에도 아이 둘을 더 낳으며 그렇게 부모가 되어간다. 금명, 은명, 동명. 인생의 금은동 메달을 모두 딴 것처럼 풍요롭고 행복한 여름날, 제주에 몰아친 태풍은 애순과 관식에게 지울 수 없는 생채기를 남기고 만다.

순진한 어린 시절부터 결혼, 성장, 그 자식들의 이야기는 사실적이면서도 판타지같은 긴 여정이다. 진심어린 애정으로 긴 세월을 함께 한 남녀는 제주를 중심으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아우르며 다양한 사건과 인물들을 담아낸다.

사진제공=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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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6부작으로 이뤄진 이번 작품은 각각 4개의 에피소드를 사계절에 빗대 쓰면서도 달디단 인생을 그리고 있다. 풋풋한 첫사랑의 봄, 가족을 이루고 행복과 상실을 맛보는 여름, 그리고 시련과 치유의 가을,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을 맞는다. '미생', '시그널', '나의 아저씨' 등을 연출한 김원석 감독과 '동백꽃 필 무렵', '쌈, 마이웨이' 등을 집필한 임상춘 작가는 ‘악인이라고는 없는’ 선하고 애틋한 인물들을 만들어내고 애정을 불어넣었다. 임상춘 작가의 필력이 빛나는 대본은 주옥같은 명대사와 개성있는 캐릭터의 향연을 펼쳐보인다. 누구 하나 버릴 것 없는 인물들이 모여 애순과 관식의 여정을 기꺼이 돕고, 힘을 보탠다.

아이유는 ‘애순’ 역과 딸 ‘금명’ 1인2역을 맡아 당돌하고 앙칼진 매력을 뽐내는가 하면, 어린 엄마로의 변화를 기대 이상으로 해내고 있다. 제주의 가난한 소녀치고는 해사한 얼굴이 다소 이질감 있지만, 그녀에게서 상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얼굴을 보였다는 성과는 칭찬할 만하다.

박보검은 말없이 애순의 곁을 지키는 ‘유니콘’같은 남자 관식을 맡아 섬세하고 묵직한 연기로 인생 캐릭터를 만들었다. 한결같은 사랑과 헌신으로 애순을 지키는 ‘무쇠’로, 말이 아닌 서글픈 눈으로, 전에 없던 순애보를 완성시켰다. 박보검은 애순의 옆에 선 관식이 그 자체만으로도 기댈 곳 없는 애순의 차가운 삶에 따스한 빛이자 외투같은 인물로 살아 숨쉬게 만든다.

사진제공=넷플릭스
사진제공=넷플릭스

두말할 필요 없는 염혜란의 ‘광례’는 눈물 버튼이자 작품을 관통하는 감성의 축이다. 그 외에도 쟁쟁한 연기력의 많은 배우들이 각각의 자리에서 오롯이 빛을 내며, 오르락 내리락 슬픔과 웃음의 롤러코스터를 태운다.

변덕스러운 제주의 사계절 안에 고스란히 인생의 희로애락을 녹여 한편의 서정시 같은 완성도를 선보인 ‘폭싹 속았수다’. 명대사와 연기, 풍광과 연출, 촬영까지 한 장면도 아깝지 않은 것이 없는, 매 순간 보석같이 빛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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