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덜어내 만든 유연하고 섬세한 연기 톤
덩치와 위압감 지우고 택한 소심함과 순수함

영화 '악마가 이사왔다'는 인형 뽑기를 하는 청년 길구(안보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목표물을 향한 예리한 눈빛, 힘을 최대한 뺀 정교한 손놀림. 덩치 산만한 어른이 인형 뽑기 기계 앞에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곧 그 이질감은 묘한 미소로 바뀐다. 길구의 표정에 깃든 순수함이 낯섦을 특별함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곧바로 길구의 내레이션과 겹쳐지며 인형 뽑기와 인생을 나란히 놓는다.
"탐색하고 목표를 정한다. 정확하게 위치를 정하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 경험치가 있으면 실력은 늘어간다. 하지만 인생은 인형 뽑기랑 다르다. 너무나 복잡하다."
인형 뽑기라는 단순한 행위와 인생이라는 복잡한 세계를 나란히 놓는 이 짧은 내레이션은 길구라는 인물의 세계를 압축해 보여준다. 영화는 이어서 백수 청년 길구의 지난 삶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낸다. 키 187cm의 건장한 체격을 가졌지만, 언제나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조차 못하는 사람. 세상은 덩치가 큰 사람이 아닌 목소리 큰 사람이 조금 더 살기 수월하다는 사실을 길구는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 깨달음 끝에 그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결국 방 안에 머무는 백수의 삶에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그렇게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던 길구의 눈에 어느 날 한 여자가 들어온다. 한밤중 아파트 단지 벤치에 앉아 맥주캔을 비우는 여자, 아랫집에 새로 이사 온 선지(임윤아)다. 그날 이후 길구의 온 시선은 선지에게 머무른다. 그러던 어느 새벽, 길구는 낮과는 전혀 딴사람이 된 선지를 목격한다. 곧 선지의 아버지 장수(성동일)에게 이 사실을 들킨 길구는 그날부터 매일 밤 선지를 감시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다.
선지는 밤이면 악마로 깨어난다. 낮의 다정하고 온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거침없고 장난기 넘치는 태도로 변해 길구를 시시때때로 골려 먹는다. 그러나 길구의 투명함이 밤 선지의 수작을 허술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받아낸다. 선지가 느닷없이 "오빠 좋아해요"라는 장난을 쳐도, 길구는 잠시 얼굴을 붉히다가 "거짓말. 이렇게 쉽게 날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런 역사가 없어!"라고 말하는,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수룩함이 길구라는 인물의 무해한 매력을 완성한다.
거대한 체구에 스며든 완벽한 무해함. 이 오묘한 대비가 길구라는 인물에 숨결을 불어 넣으며 '악마가 이사왔다'에 미더움을 더한다. 187cm의 장신임에도 영화 속 길구는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을 만큼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포켓남'으로 변주된다. 체격이 주는 위압감을 지워내기 위해 힘을 뺀 안보현의 연기는 그 자체로 유연하고 섬세하다. 어깨를 살짝 움츠린 자세,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시선, 말끝마다 머뭇거리는 호흡까지 세밀하게 조율한 모습에서 덩치 큰 순둥이의 결을 고스란히 보게 한다.
독자들의 PICK!

이로써 관객은 덩치와 무게가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오히려 편안히 곁에 두고 싶은 듬직한 사람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특히 장난기 가득한 밤의 선지 앞에서 당황하거나 우물쭈물하는 표정은 강인한 이미지를 벗고 순도 높은 순둥이로 변신한 안보현의 변주력을 확실히 보여준다. 안보현은 덩치와 표정, 리듬과 톤을 철저히 분리해 길구의 무해한 매력을 입체적으로 완성해 냈다.
이는 안보현이 쌓아온 필모그래피와도 확연히 다른 결이다. '이태원 클라쓰'에서의 서슬 퍼런 악역, '군검사 도베르만'과 '재벌X형사'에서의 강인한 주연 캐릭터처럼 그는 줄곧 체격과 존재감이 주는 힘을 전면에 내세워왔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는 그 힘을 거둬들이고 공허함과 주저함, 그리고 타인의 반응을 살피는 소심함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연기 톤은 낮게 깔고 동작은 반 박자 늦게 반응하도록 설정해 길구의 낯섦과 순수함을 부각시켰다. '유미의 세포들' 속 모습과도 살짝 겹치지만, '악마가 이사왔다'에서 무해함의 순도가 더 높아 한층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안보현이 직접 "말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라 정의한 길구는 이렇게 완성된 연기를 통해 덩치보다 마음의 크기로 기억되는 인물로 자리 잡는다.
위압감 대신 무해함을 선택한 이번 연기는 배우로서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동시에 관객에게는 보다 친근한 이미지를 남긴다. 웃음을 유발하는 엉뚱함 속에 숨어 있는 순수함, 그리고 서툴지만 끝내 용기를 내는 성장의 궤적은 영화의 결을 한층 부드럽게 만든다. 무엇보다 안보현이 길구를 통해 증명한 건 크기나 힘이 아닌 마음의 온도가 한 사람의 존재감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이다.
'악마가 이사왔다'는 오는 13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