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태안서 母와 장보고 있는데 오디션 연락 받아"
"외할머니 손숙, 내게 '자랑스럽고 사랑한다' 말해줘"
"할리우드서 동양배우 아직 갈 길 멀어..기쁘게 선도 감당"

충남 태안에서 보낸 셀프비디오 한 편이 전 세계가 주목하는 넷플릭스 대형 시리즈의 주인공을 탄생시켰다.
원로 배우 손숙의 외손녀이자 한국계 호주 배우 하예린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브리저튼' 시즌4(이하 '브리저튼4')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며 단숨에 글로벌 주목을 받는 '현대판 신데렐라'가 됐다. '브리저튼'은 19세기 영국 리전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스캔들과 로맨스를 앞세워 넷플릭스 대표 흥행작으로 자리 잡아온 프랜차이즈다.
시즌4는 결혼에 무심한 자유로운 영혼 베네딕트 브리저튼(루크 톰프슨)이 가면무도회에서 만난 은빛 드레스의 여인(하예린), 그리고 현실의 하녀 소피 백(하예린) 사이에서 사랑과 정체성, 계급의 경계가 뒤엉키는 로맨스를 그린다.
4일 서울 중구 커뮤니티 하우스 마실에서 열린 '브리저튼4' 기자간담회에서 하예린은 한국 취재진과 마주 앉았다. 그는 "한국에 온 지 1년 6개월 정도 됐는데 아직 한국어가 어설프다"면서도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작품과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차분히 설명했다.
하예린이 맡은 소피 백은 시리즈의 새 얼굴이다. 하녀 신분이지만 기지와 매력이 넘치는 인물로, 변장한 채 가면무도회에 들어선 순간부터 베네딕트의 시선을 붙잡는다. 가면으로 신분을 숨긴 채 사랑을 시작하는 설정은 '신데렐라' 서사를 떠올리게 하지만, 하예린이 강조한 소피의 결은 조금 달랐다. 그는 "소피는 겉은 단단해 보이지만 속은 여리고, 여러 겹의 감정을 품은 복잡한 인물"이라며 "그 복잡함을 연기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흥행 성과가 체감되지 않는다는 고백도 덧붙였다. 하예린은 "한국에서 2위까지 올랐다는 얘길 들었을 때도 놀랐고 감사했다"며 "글로벌 1위는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난다. 손에 닿지 않는 느낌, 현실 밖의 일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그가 '브리저튼4'의 주연 자리를 꿰찬 과정은 말 그대로 '하루 만에 바뀐 인생'이었다. 하예린은 "지난해 엄마가 사는 태안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에이전트가 연락했다. ''브리저튼' 아냐, 24시간 안에 비디오를 찍어서 보내야 한다'고 하더라"며 "하루 만에 장면을 연습해서 보냈고, 아무 생각 없이 보냈다. 당연히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그런데 며칠 뒤 상황이 급변했다. 그는 "곧바로 줌 미팅을 해야 한다고 들었고, 감독님들과 인터뷰를 한 뒤 루크 톰프슨과도 줌으로 만났다"며 "강남역에 있을 때 여주인공으로 발탁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엄마가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신데렐라'처럼 선택받은 순간이었지만, 본인은 오히려 자신을 의심했다고 했다. 하예린은 "저보다 더 예쁘거나, 더 실력 있는 배우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며 "그저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뿐이었는데 루크는 그 마음이 보였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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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트 역의 루크 톰프슨과 호흡에 대해선 촬영 방식 자체가 관계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하예린은 "가능한 한 시간 순서대로 찍었다. 두 인물이 서로를 알아가는 이야기라 저희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면서 작업할 수 있었다"며 "유머 코드가 비슷하다. 루크는 사랑이 많고 좋은 친구"라고 애정을 드러냈다.

'브리저튼'이 가진 모던함도 짚었다. 하예린은 "시대극 배경이지만 오늘날의 모습을 반영한 작품"이라며 "누구나 자신이 상상하는 환상을 투영해 볼 수 있기 때문에 전 세계 관객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성적 취향이 자연스럽게 존재한다"고 말했다. '과거의 의상'을 입었지만 시선은 현재에 맞춰져 있다는 설명이다.
이 작품이 다루는 영역이 로맨스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도 시즌4의 특징으로 꼽혔다. 하예린이 연기한 소피를 통해 사교계의 화려함 뒤편, 하인들의 서사가 펼쳐진다. 가면무도회의 반짝임과 부엌의 현실이 한 시즌 안에서 교차하면서 계급의 간극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얘기다.
시리즈 특성상 높은 수위의 노출·베드신이 포함된 점에 대해선 두려움을 숨기지 않았다. 하예린은 "오늘날에도 여성의 몸을 비난하고 판단해도 된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 그런 시선 때문에 부담스럽고 두려웠다"며 "특히 한국은 미의 기준이 더 엄격하다고 느낀다. 한국에서 자라면서 제 몸을 바라보는 시선도 특정 방향으로 굳어졌던 시간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가 강조한 지점은 안전이었다. 하예린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저를 많이 도와줬다. 그런 장면을 찍을 때 여배우들에게는 이런 시스템이 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현장에서 기본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줬고 그게 결국 최상의 퍼포먼스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프로모션 과정에서 불거진 인종차별 논란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일부 팬들이 특정 홍보 이미지 구도가 주연인 하예린을 덜 부각시켰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과 관련해 그는 "현장에서 차별을 느끼지 못했다"면서도 "사람들이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이해되는 지점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순간들이 간과했던 디테일을 배우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나친 비난이나 혐오로 흘러가진 않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간담회의 또 다른 화제는 '손숙의 외손녀'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하예린'이라는 이름으로 옮겨가는 순간이었다. 하예린은 "할머니가 조언을 따로 해주신 건 없다"면서도 "작품을 다 보셨다. 후배들과 함께 보신 사진을 보내주셨는데 눈이 안 좋으셔서 TV 가까이에서 보셨더라"며 "할머니가 '자랑스럽고 사랑한다'고 해주셔서 따뜻하면서도 마음이 짠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늘 아침엔 노출 장면이 민망했다고 하시더라. 저는 넘기실 줄 알았는데 다 보셨더라"며 웃었다.
하예린이 이번 시즌을 통해 얻은 것은 주인공의 자세였다. 그는 "한국에서 연기를 배울 때 작품을 대하는 태도, 조사하고 준비하는 방법을 배웠다"며 "주연으로서 현장에서 가져야 할 태도를 계속 생각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태도는 단순한 성실함이 아니라 스태프와 배우들이 최고의 결과를 내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책임을 지는 방식이다.
그 책임감은 가면 증후군 고백으로 더 또렷해졌다. 하예린은 "가끔 제가 가면증후군을 겪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자리에 온 게 운 때문인 것 같고 이 운이 언제 다할지 두려움도 든다"면서도 "중요한 건 책임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이 책임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할리우드에서 동양 배우들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변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게 기쁘고, 제가 기쁘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다음 시즌 출연 가능성에 대해 "소피가 브리저튼가에 소속된다면 다음 시즌에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로맨스의 결말과 별개로, '브리저튼 가족'이 된 캐릭터의 확장 가능성을 열어둔 셈이다.
'브리저튼4'에서 하예린은 가면무도회의 은빛 드레스와 하녀의 앞치마 사이를 오가며 사랑과 계급, 정체성을 동시에 연기한다. 누군가에겐 동화 같은 캐스팅 스토리로 소비될 수 있지만 당사자는 그 동화를 책임감으로 꽉 쥐고 있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반짝이는 순간보다, 그 구두를 신고도 끝까지 걸어야 하는 사람이 어떤 표정으로 무대에 서는지가 지금의 하예린을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