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제주 4.3, '백비'에 새길 진짜 이름을 기다리며

‘내 이름은’ 제주 4.3, '백비'에 새길 진짜 이름을 기다리며

권구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6.04.07 15:09

'거장' 정지영 감독이 염혜란과 그려낸 비극의 역사

영화 '내 이름은'은 제주4·3사건의 비극을 다루며, 주인공 정순(염혜란)이 유년의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정지영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제주4·3사건의 진실과 마주하고 희생자들에게 올바른 이름을 찾아주자고 독려했다. 영화는 거짓과 폭력에 맞서는 양심의 연대를 강조하며, 아직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한 제주4·3의 진정한 이름을 새길 날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제공=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사진제공=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흔히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망각을 신이 내린 가장 너그러운 축복이라 칭송한다. 이불킥을 하고픈 어제의 수치스러운 실수부터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상실의 아픔까지, 영혼에 깊게 파인 흉터를 일일이 기억해야 했다면, 단 하루의 내일조차 온전히 기약하지 못했을 터다. 기억의 휘발이란 그렇게 인간이 어제의 고통을 뒤로하고, 내일을 향해 보다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영화 ‘내 이름은’의 주인공 정순(염혜란) 역시 이러한 망각의 기전 속에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에겐 유년의 기억이 삭제됐다. 생명이 움트는 눈부신 봄날이라지만, 정순에겐 찬란한 햇살 아래 따스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이유 모를 발작이 찾아올 따름이다. 애써 찾은 병원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기에,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기억의 회로를 잠시 차단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정순의 삶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깊은 흉터인 제주4·3사건과 같은 길을 걷는다. 대한민국의 아픔이었지만, 군부정권 아래 '민주화'와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그 사실을 철저히 감춰뒀던 사건이다. 덕분에 아직까지도 그 진상을 오롯하게 알고 있는 국민들이 드물다. 유사한 비극인 5.18 민주화운동이 이제와 제 모습을 찾았다면, 상대적으로 제주4·3사건이 가야할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사진제공=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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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민국 영화계의 큰 어른인 정지영 감독이 움직였다. 1978년 현기영 작가가 ‘순이삼촌’을 통해 제주4·3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면, ‘내 이름은’은 그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자고 독려한다. 이름이란 무언가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시발점이다. 진짜 이름을 찾는다는 건 곧 그것의 본질을 헤아리는 과정이다. 진실과 마주했다면 그에 걸맞은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마땅하다. 이제는 ‘5.18 민주화 운동’이 그러했듯, 그날의 희생 역시 비극의 파편을 넘어 온전한 제 이름을 찾아갈 때다.

정순이 기억을 찾아가는 작법은 전형적이다. 허나 어느덧 잊혀진 기억이 된 제주4·3사건과 그 희생자를 상기한다면 그 발걸음이 한 없이 슬프고 무거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힘을 내야하는 이유는 현대에 그려지는 ‘정순’의 아들 ‘영옥’(신우빈) 때문이다. 반장이지만 같은 반 일진 ‘경태’(박지빈)의 힘에 묻어갈 수밖에 없는 모습은 독재 권력에 제주4·3사건을 외면했던 우리와 같다. 하여 또다시 반성의 마음을 곱씹는다.

거짓과 폭력에 맞설 수 있는 건 결국 양심의 연대다. 영옥이 친구들과 불의에 맞설 때, 비록 얻어맞은 머리에서 피가 흐를 수는 있지만, 그래도 정의를 지킬 수 있었다. 비단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내 이름은’에도 정지영 감독의 뜻에 고개를 끄덕인 1만 명의 시민 후원이 존재한다. 영화가 끝나고 올라가는 길고 긴 제작진 목록을 보노라면, 그 어떤 영화의 엔딩보다 벅찬 여운이 밀려온다. 그 누구도 쉽사리 먼저 극장 의자에서 일어나기 힘들 엄숙한 순간이다.

“‘봉기·항쟁·폭동·사태·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 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 제주 4.3 평화기념관에 전시된 ‘백비’ 설명문

사진제공=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사진제공=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제주 4.3 평화기념관의 ‘백비’는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있다. 어쩌면 아직도 쓰러져있는 모양새다. 이 돌 위에 진짜 이름이 새겨질 때, 그제야 희생자들의 원념도 승천할 수 있을 터다. 그렇기에 영화 ‘내 이름은’이 소중하다. 이제는 영화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 받아 타국의 사람마저도 눈물 짓는 역사가 됐다. 아프기에 잊고 있었던 그 기억을, 이제는 용감히 꺼내야 할 순간이 왔다.

정순은 매년 찾아오는 따스한 봄볕을 힘들어했다. 외출할 때면 늘 선글라스 그늘 아래 눈을 감췄다. 감히 바라볼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에 초연한 듯 흰머리를 감추는 법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매 년 찾아오는 4월의 봄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 그 속에 배어있는 슬픔을 피할 수는 없다. 부디 ‘내 이름은’과 함께 올해 제주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엔 유채꽃 내음이 가득하길 바라본다.

영화 ‘내 이름은’은 오는 15일 개봉한다. 15세 이상 관람가. 112분.

권구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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