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도에 내몰렸던 기아자동차는 1997년 7월15일 부도유예협약을 맺고 위기를 모면했다. 부도유예 조치는 몇 달 뒤 들이닥칠 운명인 IMF 사태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아차 '생존'에 필요한 자구노력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회사 경영진과 노조는 '대마불사'를 볼모로 구조조정을 외면했다. 기아차는 중소기업에나 적용 가능한 '화의'를 일방적으로 신청하고 2개월간 시간을 끌었다. '구조조정'의 시기를 놓친 기아차는 10월22일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이듬해인 1998년 5월, 금융감독위원회가 제출받은 그룹별 구조조정 진도표를 보면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은 목표 대비 100%를 넘어섰다. 반면 대우그룹의 진도율은 18%대에 머물렀고, 대우그룹은 공중분해의 운명을 걷게 되었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은 "대우가 해체된 것은 시간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고 회고했다. 대우가 자구노력에 적극 나섰다면 결과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란 얘기로 들린다.
올들어 하루에 5.1개의 기업이 부도로 쓰러지면서 1998년 이후 기업 부도가 사상 최대에 달하고, 가계파산도 3년새 2배 이상 늘었다. 대손충당금이 늘고 예대마진 마저 줄어들면서 은행들의 수익은 반토막이 났다. 내년 상반기에는 주요 기업의 채무상환도 몰려있어 STX·동양 부도사태의 '전염효과' 마저 걱정스럽다. 세계 각국이 이미 '출구전략'으로 향하고 있지만, 한국은 뒤늦게 기업 부실화 이슈가 불거지고 있는 형국이다.
이에 따라 기업들로선 '긴장의 끈'을 유지해야 한다. 특히 자금난이 조금이라도 거론된 기업이라면, 시장의 의구심을 불식시키기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이를 테면 예상을 뛰어넘은 '과감한' 조치로 시장의 불안을 단숨에 잠재웠던 '버냉키식' 대응 말이다. 앞서 美 연준의 벤 버냉키 의장이 기준금리를 제로(0) 수준으로 낮추는 동시에 무제한 '양적완화'라는 전례없는 조치를 선보임으로써 미국발 금융위기를 진화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동부그룹이 시장의 예상치를 웃돈 '고강도' 자구계획을 발표한 점은 긍정적이다. 시장은 이제 동부그룹이 약속을 제대로 지킬지 주목할 것이다.
이러한 기업의 자구노력 과정에선 은행의 역할이 매우 크다. 은행들이 너나없이 '비올 때 우산을 뺐지 않겠다'는 것은 자금난에 빠진 기업을 모두 살리겠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IMF 때 부실 대기업에 물려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가 '줄초상' 당했던 악몽을 잊지 않고서야, 어느 은행이 '퍼주기'식 만용을 부릴까. 그럼에도 은행들이 '비올 때 우산을 씌워주겠다'는 것은 '옥석'은 가려 지원할 곳은 돕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 지원만 하면 생존 가능성이 엿보이는 기업, 파산시 부실 '전염효과'가 상당한 기업이라면 은행과 채권자가 조금씩 양보해 회생을 도모한다면 개별 채권자는 물론이고 국가경제, 납세자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다. 그러나 기업의 부실이 은행으로 전가되는 방식은 안된다. 생존 의지가 약하거나 구조조정에 미온 적인 기업은 과감히 지원을 끊고, 오너 및 노조가 기득권을 던질 각오로 자구노력에 협조적인 곳만 가려, 지원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 것이 IMF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