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무슨일이?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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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16일. 박정희 당시 육군 제2군 부사령관은 쿠테다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6일만에 지방의회,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해 자신이 의장으로 앉는다. 이때부터 사회단체나 정당의 활동도 제한됐고 기존의 헌법도 '중지'됐다. 1년이 조금 지난 뒤 박 의장은 헌법 개정안을 발표한다. 대통령의 권한이 대폭 강화됐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 44년 전 오늘 (1962년 11월5일)은 박 전 대통령의 17년 재임의 초석을 다진 헌법 개정안이 통과된 날이다. 5·16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위원회는 그해 7월 헌법개정특별심의위원회를 구성했다. 박 위원장이 당시 헌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내건 조건은 '민정 이양'이었다. 9인으로 구성된 심의회는 3개월간의 검토 끝에 수정된 헌법을 내놓는다. 전문 5장 121조 부칙 9조로 구성됐다. 헌법 개정안에는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이 담겨 있었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행정부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맡으며
"내 말은 다 거짓이여...믿지 말게." 눈웃음이 인상적인 마음씨 좋게 생긴 노승이 해맑게 웃으며 얘기한다.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한 취재진에게 다시금 자신의 말은 거짓이라며 속지 말라고 말하며 가볼 것을 청한다. 이 조롱과도 같은 노승의 말은 알고 보니 일종의 '선어'였다. 참선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얻은 일종의 깨달음 같은 것이었다. 언어에 얽메어 본질을 꿰뚫지 못함을 경계하는 노승의 가르침이었다. 이 노승은 또 다른 명언을 남겼는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다. 700년 전 중국에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란 책의 첫 구절을 따온 것이다. 사물의 형식이 아닌 본질로써 대하라는 가르침이었다. 이는 우리나라 불교도뿐 아니라 한 사회의 큰 가르침이 되기도 했다. 64년간 참선하며 세상의 본질을 보기 위해 노력했던 성철스님이 23년 전 오늘(1993년 11월4일) 입적했다. 1912년 경남 산청군에서 태어난 그는 진주중학교를 졸업한 17세 나이에 출가한다. 경남 합천
D-6. 미국 차기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과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1%포인트 차로 접전을 펼치고 있다. 트럼프의 성추문 사건으로 10%포인트 차이 가까이 앞섰던 힐러리는 국무장관 시절 국가 기밀을 공무용 이메일이 아닌 사적 이메일을 통해 유출했다는 혐의에 대한 재조사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갖가지 추문이 나돌면서 이번 선거는 미국 역대 최악의 선거로 꼽힌다. 이 전에도 '최악의 선거'로 꼽힌 대선이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공화당의 조지 W 부시와 민주당의 존 케리가 치렀던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다. 12년 전 오늘(2004년 11월2일)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 비난 여론 확산 등 부정적 여론을 딛고 재선에 성공한 날이다. '대통령의 아들'이자 텍사스 주의 알아주는 부호 출신인 부시는 2000년 1월 백악관에 입성했다. 민주당 출신인 빌 클린턴 정부의 8년 집권 후 오랜만에 공화당에 찾아온 기회였다. 집권 초기 '네오
'비운의 천재 뮤지션. 한국 발라드의 아버지. 대중음악 최고의 음유시인.' 떠난 뒤에야 유재하(류재하)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피지 못한 꽃' 유재하가 29년 전 오늘(1987년 11월1일) 25살의 짧은 생을 마쳤다. 그는 술에 취해 운전대를 잡은 친구의 차에 올랐고 중앙선을 넘어 결국 마주오던 택시를 들이받았다. 생애 첫 자신의 앨범을 발표한 지 석달만에 의욕 넘치던 신인가수 유재하는 서울 용산구 강변북로에서 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떠난 그는 9곡의 노래가 담긴 한 장의 앨범과 단 한 번의 방송 출연만 남겼다. 이날 그는 동창회에서 1집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름을 알리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유재하의 음악만큼은 오래도록 빛났다. 다소 불안정한 음정과 독특한 목소리 탓에 주류로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음악은 동료 음악가와 애호가들을 통해 꾸준히 거론됐다.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그의 노래들은 당시 라디오에서 오랫동안 높은 순위를 차지했
17년 전 오늘(1999년 10월3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을 떠나 뉴욕을 경유, 이집트 카이로 국제공항으로 가던 이집트 항공 990편이 JFK공항을 이륙한 지 40분만에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여객기는 매사추세츠주 동부 낸터켓 섬 근처 대서양에 추락했고 해안가에서 잔해들이 발견됐다. 레이더에서 사라지자마자 구조작업이 시작됐지만 승무원과 승객 217명 전원이 사망했다. 미국 교통안전국(NTSB)은 비행기의 추락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부조종사인 가밀 엘바투티가 자살 비행을 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엘바투티가 비행 중 엔진을 끈 점, 당시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던 점, 진급을 하지 못한 만년 부기장이었던 점, 명예퇴직이 가까웠던 점, 딸이 중병을 앓고 있던 점 등 개인적인 중압감에 일을 저질렀다는 게 자살설의 근거였다. 특히 조종석 음성 기록 장치(CVR)에 남은 엘바투티의 음성이 고의로 사고를 냈다고 결론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엘바투티는 당시 아랍어로 "나는 이제 결
1999년 10월30일 저녁 7시, 인천 중구 인현동에 위치한 4층 상가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화재로 인한 연기가 순식간에 건물에 퍼져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불은 건물 지하에 있는 노래방 내부수리 공사장에서 처음 발생해 계단을 타고 2층과 3층 사이로 번졌다. 화제는 소방차 15대와 구급차 19대, 소방관 180명과 경찰 160명이 투입돼 35분 만에 가까스로 진화됐다. 17년 전 오늘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가 발생했다. 이날 참사로 2층 호프집과 3층 당구장에 있던 10대 청소년 등 52명이 불에 타거나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연기에 질식되거나 화상을 입고 인천 길병원, 인천의료원, 인하대병원 등 인근 8개 종합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사람만 71명에 달했다. 이날 50여평 규모의 호프집에는 무려 120명이 모여 있었다. 내부에는 탁자와 의자들이 빽빽이 차 있어 통로는 겨우 한 사람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이로 인해 학교 가을축제를 마치고 뒤풀이를 하던 많은 청
'예술과 외설' 올해 정년 퇴임한 연세대학교 마광수 교수(65)는 24년 전 오늘(1992년 10월 29일) 강의 중 음란문서제조·반포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그해 발간된 책 '즐거운 사라' 개정판이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게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 이유였다. 1991년 8월 25일(서울문화사) 나온 이 책은 한 달도 안돼 문화부 간행물윤리위원회의 판매금지 결정을 받았고 1992년 8월 28일 개정판(청하출판사)을 내놨으나 결국 문제가 됐다. 마 교수는 그해 12월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아 연세대에서 직위해제 됐고 1995년 6월 유죄가 확정돼 해임됐다. 1998년 사면돼 그 해 연세대 교수로 복직해 강단에 다시 섰다. 징역형을 받은 그는 은퇴(지난 8월) 후 명예교수의 자리에도 오르지 못할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문단에 오른 마 교수의 구속은 '표현·예술의 자유'에 대한 논란에 불을 지폈다. 마 교수는 일부 진보단
"죗값을 치르겠다." 17년 전 오늘(1999년 10월28일)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제 발로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나타났다. 10년 10개월간 집과 은신처를 떠도는 도피생활을 끝내고 자수를 한 것이다. 대공 담당 형사였던 이근안은 군사정권 시절 전기고문, 물고문, 날개 꺾기, 관절 뽑기, 볼펜심 꼽기, 고춧가루 고문 등 끔찍한 기술로 학생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 등을 가혹하게 고문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온갖 고문에 통달해 다른 기관으로 '고문 출장'도 다녔다. 그는 1979년 남민전 사건, 1981년 전노련 사건, 1985년 납북어부 김성학 간첩조작 사건, 1986년 반제동맹사건 등에서 피의자를 고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5년 9월4일 이근안은 김근태 당시 민청학련 의장을 남영동 대공분실로 잡아들였다. 이근안은 이후 22일간 10여 차례에 걸쳐 김근태 의장에게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김근태 전 의장이 훗날 이때의 고문에 대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고 회고할 정도였
"지금 이 순간, 전직 대통령이었던 것이 한없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21년 전 오늘(1995년 10월27일) 노태우 전 대통령은 ‘비자금 의혹’을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노 전 대통령은 비자금 의혹을 부인하다가 경찰 수사가 좁혀오자 혐의를 인정했다.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보유설은 19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서 증권가에 나돌았다. 비자금 의혹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후 서석재 총무처 장관 등에 의해 비자금 의혹이 몇 차례 더 제기됐다. 1995년 민주당 전 국회의원 박계동이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면서 비자금 의혹은 구체화됐다. 박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규모가 '4000억원'이라고 강조하며 이 돈이 분산 예치돼 있는 은행의 계좌 조회표까지 꺼내들었다. 검찰은 바로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노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 이현우는 검찰에 자진 출두해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해당 계좌에 입금돼 있는 돈은 노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우리의 정치체제를 개혁한다." 1972년 10월27일 '평화적 통일 지향',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2대 과제로 내세운 개헌안이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 및 공고됐다. 대한민국 제4공화국 유신헌법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앞서 10월17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전국에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국회해산 및 정당 활동 중지, 헌법의 일부 효력 정지 및 비상국무회의 소집 등의 조치를 발표했다. 개헌안은 의결 및 공고된 이후 11월21일 국민투표에서 91.5%(투표율 91.9%)의 압도적인 찬성률로 확정됐고 12월27일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공포 및 시행됐다. 이른바 '10월 유신'이다. 유신헌법은 개정 당시의 취지와는 달리 사실상 박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수단이었고 국민의 기본권 침해와 대통령 권한의 비대화로 독재의 발판을 마련하게 한 헌법이라는 지적이 있다. 전문과
1960~1970년대 프로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은 라디오나 흑백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 모였다. 가난하던 시절, 국민들은 거구의 외국 선수들을 내리꽂는 한국 프로 레슬러들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상대가 일본 선수라도 되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당대 프로레슬러 중에서도 온국민의 사랑을 받은 인물은 단연 '박치기 왕' 김일이었다. 체중 140kg, 신장 184cm 거구의 그는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국민들의 마음 속에 영웅이었다. 전남 고흥 거금도 섬마을에서 태어난 김일은 마을에서 알아주던 씨름꾼이었다. 그만큼 몸이 다부졌던 그는 우연히 일본 잡지에서 본 재일교포 프로레슬링 선수인 역도산을 보고 무작정 일본행을 감행했다. 하지만 역도산을 만나는 과정은 험난했다. 동경에 발을 딛기도 전에 일본 경찰에 밀입국자로 체포돼 불법 체류자로 형무소 생활을 하게 됐다. 김일은 무작정 역도산에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1년 후 역도산의 신원보증을 통해 출소, 역도산 체
'탕탕탕' 1979년 어느 가을밤, 청와대 인근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37년 전 오늘(1979년 10월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중앙정보부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서거했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 만 62세. '10·26 사태'로 불리는 이 사건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종말을 고하고 전두환 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저녁 6시쯤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한다. 그곳에는 당시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등도 동석했다. 저녁 7시41분, 모델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김재규가 발터 PPK를 꺼내 차지철의 오른손목에 쏘았고 이어 박정희 가슴에 총을 겨눈다. 총격에 가슴과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박정희 대통령은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송 중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으로 차지철 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