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무슨일이?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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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환희, 준희. 아무 말을 할 수가 없구나! 사랑하는 내 아들, 내 딸. 상처받지 말기를, 찡그리지 말기를… 사랑받고 있기를, 사랑하고 있기를 그리고, 사랑할 수 있기를. 너희들밖에는 안길 수 없는 어머니의 품을 잊지 말기를" 8년 전 오늘(2008년 10월 2일) 오전 6시쯤 배우 최진실은 3일 전 이 같은 메모를 남기고 서울 서초구 자택 욕실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악성루머에 시달리던 그의 죽음은 허위사실과 악성댓글, 언론보도 방식뿐 아니라 친권 문제 등 우리 사회에 여러 문제를 제기했다. 1990년대 한국을 사로잡은 '국민 여배우' 최진실은 가정불화·이혼이 수년에 걸쳐 전국에 낱낱이 공개되고, 무차별적인 악성댓글·허위사실에 시달리면서 무너졌다. 아들과 딸을 남겨두고 그는 삶을 등졌다. 최진실은 당시 한 달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우 안재환에게 '25억원의 사채를 빌려주고 압박했다'는 허위사실에 시달렸다. PC통신·인터넷 보급이 확산되면서 그는 온라인에
㎡ "600년 고도 서울이 잃어버렸던 맑은 물과 시원한 바람 길을 이제야 다시 찾게 됐다." 2005년 10월1일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에서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청계천의 개통을 알렸다. 47년간 복개로 덮여 있던 청계천(중구 태평로 1가에서 성동구 신답철교까지 5.84km 구간)이 물이 흐르고 시민들이 걸을 수 있는 하천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세계 30여개 도시 시장 등 6000여명의 주요인사와 2만여명의 시민들도 청계광장에 모여 청계천의 재탄생을 축하했다. 이날 청계천에는 전국 각지에서 담아온 물이 한데 모였다. 백두산 천지, 한라산 백록담, 두만강, 압록강, 전남 영산강, 전북 금강, 경북 낙동강, 강원 소양강, 서울 한강, 그리고 청계천 시점부인 인왕산 등 10곳에서 담아온 물은 한 항아리에 합쳐져 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기원하며 청계천으로 흘려보내졌다. 조선시대 개천(開川)으로 불린 청계천은 평소 건
주연 영화 단 3편. 안하무인격 태도를 지닌 '비호감' 배우. 스피드광에 그늘진 표정. 그가 죽기 전까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반세기가 넘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그를 기억할지. 61년 전 오늘(1955년 9월30일)은 할리우드 영화배우 제임스딘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날이다. 제임스딘은 이날 누구보다 마음이 가벼웠다. 영화 '이유없는 반항' 촬영을 끝내고 모처럼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피드광에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즐겨탄다는 것을 안 조지 스티븐슨 감독은 촬영을 마칠 때까지 '자동차 금지령'을 내렸었다. 그는 자신이 아끼는 포르쉐550을 끌고 나섰다. 곧 열릴 레이싱 경주에 참가하기로 했던 제임스딘은 차를 타자마자 질주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는 영원히 운전을 할 수 없게 됐다. 마주오던 포드 차와 정면으로 충돌한 것. 차는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제임스딘의 부상은 처참했다. 목뼈가 심하게 다치는 사고를 당했고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24세
'노근리 다리'(The Bridge At No-Gun-Ri) 17년 전 오늘(1999년 9월29일·현지시간) 미국 AP통신은 이 같은 제목을 달아 미군이 약 3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노근리 민간인(양민) 학살사건'을 보도하면서 국내외에 큰 파장이 일었다. 취재기자들은 이 기사로 1년 뒤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 기사로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에 미군의 만행을 알렸고 한·일 공동조사까지 추진됐다. 2년 넘는 조사에도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고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지만 지시에 대해선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의 잘못이 기사를 통해 만천하에 드러났다. 기사에 따르면 49년 전 6·25전쟁이 발발한 지 한달도 안된 7월25~29일 남으로 내려오던 피난민 약 300명은 충북 영동군 노근리 쌍굴다리(경부선 철로) 인근에서 무참히 사상당했다. 북한군을 막기 위해 주둔하던 미군 제1기갑사단 7기병연대 예하 부대는 "북한군이 피난민에 숨어 있다"며 피난민을 공격 대상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96년 전 오늘(1920년 9월28일) 오전 8시 수감번호 371번 유관순 열사는 유언을 남기고 서울 서대문형무소(당시 경기도)에서 눈을 감았다.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에도 마지막까지 '대한 독립'을 외친 유관순은 열 여덟 꽃 다운 나이였다. 가혹한 고문으로 그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고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였다. 그해 4월 대한제국 영친왕의 결혼 특사로 형량이 줄었지만 유관순은 결국 햇빛을 보지 못하고 수감 1년 만에 옥중에서 최후를 맞았다. 소녀 유관순은 그해 3월 1일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일 정도로 강했다. 그는 1년 전 '3·1 만세운동'과 4월 1일(음력 3월 1일) 고향인 천안(당시 충청남도 목천군) '아우내 만세운동'에 주도·가담하면서 옥고를 치
"김정일 동지께서 인민군 지휘성원들의 군사칭호를 올려주는데 대한 명령 제0051호를 하달하셨다. 명령엔 김경희, 김정은, 최룡해 등 6명에게 대장의 군사칭호를 올려준다고 지적되어 있다."(조선중앙통신 보도 중) 2010년 9월27일 당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셋째 아들인 김정은에게 인민군 대장 칭호를 수여했다. 이전부터 김정은이 후계자라는 것은 비공식적으로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공식발표에서 그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김정은의 후계 구도를 공식화하고 3대 세습을 공고히 한 것이다. 김 전 국방위원장은 앞서 김정은의 생일인 1월8일에 맞춰 그를 후계자로 결정하고 이 같은 내용의 교시를 노동당 조직 지도부에 하달했다. 그 당시 북한 내부에선 김정은의 별칭이었던 '샛별장군이 후계자가 됐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후계자 결정 이후 김정은은 김 대장 또는 청년대장이라고 불린 것으로 알려진다. 김정은은 친형인 김정철보다 카리스마와 리더십에서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다. 김 전 위
"개구리(도롱뇽 알) 잡으러 간다"던 아이들 5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11년6개월 만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당시 군·경 50만명이 투입되고 전 국민의 관심이 쏟아졌지만 아이들은 집에서 멀지 않은 야산에 묻혀 있었다. 14년 전 오늘(2002년 9월26일)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으로 알려진 대구 성서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아이들 5명의 시신이 와룡산 중턱에서 발견됐다. 도토리를 주우러 간 시민이 유골 4구와 신발 5켤레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1991년 3월26일 사라진 △우철원(당시 13세, 1979년생) △조호연(당시 12세, 1980년생) △김영규(당시 11세, 1981년생) △박찬인(당시 10세, 1982년생) △김종식(당시 9세, 1983년생)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우리 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2002년 뜨거웠던 한·일 월드컵에 이어 추석(21일) 연휴를 마치고 일상에 복귀하자마자 전해진 소식이었다. 아이들은 5·16군사정변으로 중단됐던 지방자치제 부활
"계란으로 바위치기, 바위는 죽은 것이지만 계란은 살아서 바위를 넘는다."(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 송강호와 임시완의 대화 중.) 1981년 9월 부산에선 학생·교사·회사원 등으로 구성된 사회과학 독서모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들의 모임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부산 지검 공안이 이 모임 구성원들을 영장도 없이 체포한 것. 이적서적을 소지하고 공부모임 등을 통해 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한 혐의라고 했다. 앞서 그해 3월 출범한 군사 독재 정권은 집권 초기 통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이 이어진 것. 끌려간 곳에는 이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계엄령에 금지된 집회를 하거나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는 집회에 참가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이들이 십여명 더 있었다. 체포된 총 22명 중에는 실제로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이들도 있었지만 단순 독서모임이나 다방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다 끌려온 이들도 포함됐다. 평범한 일상을 지
"엄마·아빠 꿈 포기하지 마세요." 1987년 9월24일 서울대병원에서 체외수정으로 임신 된 다섯 쌍둥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아들 둘·딸 셋, 인공수정으로 탄생한 세계 최초 다섯 쌍둥이였다. 산모 노씨(32 출산당시)는 1978년에 결혼했으나 배란장애(무배란)로 9년동안 아기를 갖지 못했다. 당시 서울대병원 장윤석 산부인과팀은 난관수정방법을 이용해 노씨 부부의 임신을 도왔다. 난관수정이란 인공으로 배란된 난자와 함께 정자를 난관 내 이식해 임신시키는 방법으로 원인불명 불임증을 치료하는데 쓰인다. 장 교수 팀은 3개 이상의 수정란을 노씨 자궁에 이식, 1987년 2월18일 여섯 쌍둥이 임신을 성공시킨다. 임신 8개월 후 산모 노씨는 예정보다 7주 빠른 32주 4일만인 9월24일 제왕절개수술로 사산된 1명을 제외한 다섯 쌍둥이를 출산한다. 남아 2명, 여아 3명으로 남아의 몸무게는 각각 1.41kg, 1.65kg, 여아는 각 1.61kg, 1.60kg, 0.77kg이었다. 미숙아로
1992년 9월23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2가 83-7번지에 위치한 당시 중화민국(대만) 대사관이 열쇠를 한국 외무부에 넘겼다. 중화민국 대사관의 새 주인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됐다. 같은 시간 주 타이완 섬 타이베이 한국 대사관도 공관을 비웠다. 한 달 전인 8월24일, 한국은 중국과 수교하는 동시에 대만과 단교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중국 본토와 타이완, 홍콩, 마카오는 하나고, 전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는 자신뿐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은 자국과 수교하는 국가들에 이 원칙을 따를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한국도 대만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중국 본토와 대만의 갈등은 1921년부터 시작됐다. 그해 중국 공산당이 창당하면서 기존 중국 국민당과 세력을 다투기 시작한 것이다. 1949년 두 당간 국공내전이 벌어지고 승리한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중국 국민당은 난징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로 옮겼다. 이후 중국 본토 통치권은 완전히 중
"나는 배우지 못해서 말은 못하나 행동으로 부정과 불의를 규탄하겠다. 여기 앉은 각료들은 3년 동안이나 부정과 부패를 한 피고들이다." 1966년 9월22일 '한국비료공업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추궁하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날 마지막 질의자로 단상에 오른 한 국회의원이 언성을 높였다. 국회의원보다는 장군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는 김두한 당시 한국독립당 의원이었다. 그의 발 옆에는 마분지로 포장된 양철통도 놓여있었다. 증거로 가지고 온 사카린이라고 했다. 당시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던 한국비료는 건설 자재를 가장해 수천만원 상당의 사카린(인공 감미료) 원료 60톤을 밀수했고,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이 정치 자금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국세청은 해당 사실을 확인하고도 추징금만 걷은 채 봐주기식으로 사건을 끝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밀수'를 '5대 사회악' 중 하나로 규정하고 발본색원하겠다는 각오를 다질 때였다. 한 언론이 이 사건을 폭로하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 방송에는 패티김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노래가 뒷배경에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옷차림새나 어투는 조금씩 달랐지만 얼굴 생김새나 체형이 영락없는 '핏줄'이었다. 서로 생사 확인도 못하고 살았던 30여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당시 이 방송을 보던 시청자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며 분단의 아픔을, 함께 하지 못한 가족들의 아쉬움을 함께 나눴다. 31년 전 오늘(1985년 9월21일) 첫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남북이 분단된 지 32년 만이었다. 당시 갓난 아기였던 자식은 성년이 됐고 새파란 청춘이었던 아버지는 백발이 됐다.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기까지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양측은 1954년 3월1일 만들어진 휴전협정에 의해 '실향민간귀향협조위원회'가 설치됐고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적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렇다할 논의가 진전되진 않았다. 이산가족 상봉 실마리를 푼 건 17년 뒤인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