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무슨일이?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총 306 건
"오빤 강남스타일!" 대한민국의 한 가수가 신곡 뮤직비디오 시작과 함께 외치는 이 가사는 전 세계에 '싸이 열풍'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4년 전 오늘,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Gangnam Style)' 뮤직비디오가 유튜브 공개 133일 만에 역대 가장 많은 '좋아요' 수를 기록하며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당시 이미 200만 개를 넘었던 강남스타일은 기존 1위인 LMFAO의 'Party Rock Anthem'의 157만여 추천수를 훌쩍 뛰어넘었다. 조회 수도 8억 건까지 치솟았다. 이는 할리우드 인기 가수 저스틴 비버가 2년10개월에 걸쳐 이룬 것을 단 4개월 만에 달성한 것이다.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지 19일 만에 조회 수 1000만을 기록했고 불과 두달 만에 2억 건을 돌파했다. 뮤직비디오의 기록적인 인기와 함께 강남스타일은 '빌보드 핫100' 차트에서 7주간 2위를 차지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호주 등 30여개 나라에서는 음원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강남스타일 열풍
"범행 동기는?" "세상이 싫다. 빈부차이가 너무 크게 나 있고 돈 없는 사람은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세상은 돈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있다."(1994년 9월 지존파 일당의 진술 내용) 1994년 4월, 학교 선후배와 교도소 동기 등이 모인 도박판에서 전년도 떠들썩했던 '고위층 대입 부정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여기 모인 이들 모두 가난한 농촌에서 자라고 집안 형편상 중·고교를 중퇴했다. 그러니 또래 젊은이들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유흥가를 다닌다거나 대학 진학을 위해 돈을 쓴다는 것 자체가 소외감과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이들은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옮기자는 데에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 '지존파'였다. 조직을 결성하고 경찰에 붙잡히기까지 약 6개월 동안 이들이 벌인 무차별적 엽기 살인극은 범행 수법이나 내용면에서 하나 하나 열거하기가 힘들 만큼 섬뜩하고 잔인했다. 이들은 지리산에서 물과 풀뿌리만 먹고 1주일 동안을 버티는 지옥 훈
"산과 물, 나무가 움직이는 것과 흡사했고, 나는 새보다도 빨랐다." 조선에서 첫 열차가 운행되던 날, 사람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던 어떤 교통수단보다 빨랐다. 거대하고 시커먼 쇳덩어리는 11자로 난 길을 따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1시간에 무려 22.6km나 갈 수 있었다. 서울에서 약 33km 떨어진 인천까지는 1시간30분 걸렸다. 117년 전인 오늘(1899년 9월18일) 우리나라에 최초 열차인 경인선이 개통됐다. 경인선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이자 물자 운송의 혁명적 변화의 시발점이다. 하지만 경인선은 조선의 '눈물'로 개통된 열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힘없는 나라의 설움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물자는 배로 운송됐다. 1883년 인천 제물포 항구가 개항하면서 물자 운송은 점점 활발해졌다. 한강을 따라 움직이는 배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 조선에서는 열차의 필요성이 조금씩 제기됐다. 하지만 선뜻 나서기는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 달라." 36년 전 오늘(1980년 9월17일) 계엄보통군법회의는 야권지도자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80년 당시 신군부가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발생한 5·18 광주민주화 항쟁은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조작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결론이었다. 김 전대통령은 이로부터 24년이 지난 2004년 무죄선고를 받으며 이같은 오명을 씻게 된다. 사건의 시작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1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군부는 비상계엄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당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대표였던 김대중과 그 지지세력 24명을 내란음모·국가보안법·계엄법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신군부는 구속기소 5일만에 5·18 민주화운동을 “김대중이 대중을 선동해 민중봉기와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는 내용의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고 7월4일 김대중 등 37명을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파운드화는 곧 폭락할 것이다." 1992년 9월, 헤지펀드 대부 조지 소로스는 신문과 방송에 나와 공언했다. 평소 언론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그의 발언은 금세 국제금융시장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파운드화 평가절하는 영국의 장래에 대한 배신행위." 당시 영국총리 존 메이저는 소로스에 반박했다. 24년 전 오늘(1992년 9월16일), 영국 정부가 조지 소로스에게 패했다. 이날 영국은 유럽환율메커니즘(ERM)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소로스를 비롯한 헤지펀드 투자자들이 파운드화 투매를 시작한지 하루만에 백기를 든 것이다. '검은 수요일'(Black Wednesday)이라 불리는 이날은 영국 정치·경제 사상 최악의 굴욕을 당한 날이 됐다. ERM은 유럽의 화폐통합에 대비하는 제도로 각 국가의 통화가치 안정을 위해 환율 변동폭을 정해진 범위 안에서 제한하는 시스템이었다. 영국은 1990년 10월8일 ERM에 가입했다. ERM 하에서 영국 파운드화는 독일 마르크화의 ±6%
라면의 역사는 한국 사회의 성장과 함께 한다.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깜짝' 등장한 라면은 한때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서민의 든든한 식량이 됐다. 현재는 많은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는 식품으로, 간단한 요기를 위한 간편식으로, 때로는 술을 과하게 먹은 다음날의 해장용으로 사랑받고 있다. 빨간 국물에 꼬들꼬들한 면은 여전히 우리의 입맛을 잡아당긴다. 53년 전 오늘(1963년 9월15일)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라면이 출시된 날이다. 구불구불 과자같이 뭉쳐있는 튀긴 면과 국물용으로 별도로 포장된 스프는 당시로선 상당히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다. 이 딱딱한 면이 끓는 물에 다시 쫄깃한 식감의 면으로 변화하는 것도 신기했다. 이날 우리나라에 처음 라면을 출시한 기업은 삼양식품. 삼양식품은 일본의 라면 기술을 도입해 국내 최초의 라면을 만들었다.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은 삼양식품은 일본 묘조식품의 라면 기계 2대를 사들여 한국식 라면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일본에서 세계 최초로 라면이 개발된 19
"작년에는 아빠가 롤러스케이트를 사주셨고, 엄마는 생일 케이크를 사주셨는데 부모님은 언제 퇴원해 저와 함께 사나요?"(김포공항 내 폭발 사고로 목숨을 잃은 부부의 외동딸) 30년 전 오늘(1986년 9월14일), 김봉덕·옥금숙씨 부부는 미국으로 떠나는 친정 어머니와 오빠를 배웅하기 위해 김포공항(당시 김포국제공항)을 찾았다.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어머니와 오빠는 5년만에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들을 배웅하는 자리에는 20여명의 친정 식구들이 함께 있었다. 3층 출국장에서 배웅을 마치고 내려온 이들은 입국장 밖으로 나와서도 바로 헤어지지 못했다. 이들은 택시 정류장 앞에서 끝내지 못한 대화를 이어갔다. 그 순간 입국장 입구에 있는 쓰레기통에서 펑 소리와 함께 폭발물이 터졌다.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현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사건으로 김씨 부부를 포함한 일가 친척 4명이 사망했다. 이들의 빈소에선 남은 가족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분단 46년 만에 남·북은 다름을 인정하고 국제사회에 '두 개의 한국'을 알렸다. 25년 전 오늘(1991년 9월 13일) 대한민국(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UN(국제연합) 사무국에 동시 가입 결의안을 제출했다. 5일 뒤 남북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702호에 따라 만장일치로 신입 회원국이 됐다.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남북이 평화·적화통일을 주장하던 당시 UN 동시가입 성사는 기념비적 사건으로 손꼽힌다. 당시 양측은 국제사회에서 각자 유일 정부를 내세우며 의견을 좁히지 못했으나 UN 동시가입을 통해 각자의 체제를 인정했다. 가입순서는 국명표기 알파벳 순서에 따라 북한(D.P.R.K)이 160번, 한국(R.O.K)이 161번째다. 이날 남측에선 이상옥 외무장관이 수석대표로 참석했으며, 북측은 강석주 북한외교부 부부장이 수석대표로서 가입수락 연설을 했다. 언론에선 연일 관련 뉴스가 쏟아졌고 가입실황이 방송으로 생중계됐다. 남한은 가입 후 미국에 문화사절단
나흘간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내렸다. 순식간에 물이 도시를 타고 넘쳐 흘렀다. 한강도 이 비를 다 받아내지는 못했다. 결국 한강 하류의 행주대교 부근 제방은 물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한강을 타고 넘쳐흐른 빗물은 일산 등 경기도 일대로 흘러가 마을을 집어 삼켰다. 26년 전인 1990년 9월12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홍수로 꼽히는 '한강 대홍수'가 일어났다. 그 해 9월 9일부터 12일까지 한강 일대를 포함한 중부지방에는 많은 비가 집중적으로 내렸다. △경기도 이천 581mm △수원 529mm △강화 512mm △홍천 508mm △양평 491mm △서울 486mm의 강우량을 기록했다. 경기도 이천, 수원 등지에서 한시간에 내린 비의 양이 59mm에 달했다. 경기도 수원에서는 하루 동안 296.3mm의 강우량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비로 한강 하류의 수위는 감당할 수 없은 속도로 상승했다. 한강 인도교 수위도 위험 수준인 10.5미터를 훌쩍 넘은 11
"대한민국이 1948년 8월15일 출범했다고 이날을 건국절로 하자는 일부 주장이 있습니다. 이는 역사를 외면하는 처사일 뿐 아니라 헌법에 위배되고 실증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 역사 왜곡이고 또 역사의 단절을 초래합니다."(지난 8월12일 청와대 독립유공자 및 유족 초청 오찬행사에서 김영관 선생 발언 중) 1919년 4월 각 지방 출신 대표자 27명이 상하이에 모였다. 이들은 제1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고 전문 10조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통과시켰다.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하고 정치체제를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조국 독립을 위해 외교적 혹은 무장투쟁 운동을 벌여온 단체들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중국에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한 상하이 임시정부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연해주)에는 손병의를 대통령으로 한 정부 조직인 대한국민의회가 세워졌다. 국내에는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한 한성임시정부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내에서 전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났
· 2001년 9월11일 미국 뉴욕의 화요일 아침은 여느 때와 같았다. 직장인과 학생, 주부 모두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했다. 평범하고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영화같은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이날 오전 8시46분 비행기 한 대가 뉴욕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 93층과 99층 사이로 돌진했다. 화염에 휩싸인 건물, 어디선가 날아오는 파편들, 흩어진 시체, 울부짖음, 비명. 일대는 지옥으로 변했다. 17분 뒤 또다른 비행기가 남쪽 건물 77층과 85층 사이에 충돌했다. 110층짜리 쌍둥이빌딩은 곧 화염에 휩싸였다. 오전 10시28분 두 건물은 완전히 붕괴됐다. 이슬람 무장단체인 알 카에다의 동시다발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9·11테러였다. 미국 본토가 공격을 받은 사건으로 미국은 물론 전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19명의 테러범은 사건 당일 아침 4개조로 나뉘어 4대 미국 민간 항공기를 납치했다. 이중 2대는 세계 경제의 심장인 세계무역센터로 돌진했다. 세 번째 비행기는 오전 9
'미술계 신데렐라와 청와대 실세의 잘못된 만남.' 권력형 비리 의혹과 학위위조 논란으로 정국을 흔든 '신정아 스캔들'로 7년 전 오늘(2007년 9월10일) 변양균(67·당시 58세) 전 청와대 정책실장(현 스마일게이트 인베스트먼트 회장)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지도층에 대한 '학력 검증' 파문까지 확산시키며 참여정부(2003~2008년) 도덕성에 생채기를 낸 레임덕 사건으로 손꼽힌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이 사건에 대해 "깜도 안된다"고 하면서 더 논란이 됐다. 신정아(44·당시 35세) 전 동국대 교수의 학력위조가 시발점이다. 허위학력으로 교수까지 오른 신정아는 '2008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에 임명된 후 언론을 통해 거짓말이 들통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후 검찰의 학위위조 수사과정에서 변양균과의 관계까지 드러났다. 23살 나이 차에도 둘은 애틋했다. 암 투병 중인 아내와 자식까지 있었던 변양균은 신정아의 학력위조 재판에서 옹호하는 증언을 했다. 신정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