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600년전 태종의 선택 그리고, 삼성家

[광화문]600년전 태종의 선택 그리고, 삼성家

오동희 산업1부 부장(재계팀장)
2012.03.09 08:04

 '역사의 연구'라는 유명한 저서를 남긴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문명평론가 토인비는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다.

 역사의 반복은 전세계적인 문명뿐만 아니라 한 국가, 한 가정, 한 인간 내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

 최근 삼성가의 상속문제로 논란의 중심에 선 이맹희씨를 두고 혹자는 조선 3대 왕 태종(이방원)의 장자 '양녕대군 이제'와 비교하곤 한다. 3남 동생에게 '대권'이 넘어간 것과 그 행적의 유사함에서 비롯된 듯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당시 세자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군주로서 뿐만 아니라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태종의 심경이 잘 묘사돼 있다.

 태종은 즉위 18년(1418년)에 세자 이제의 행실에 대한 각종 상서와 신료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그의 지위를 폐해 경기도 광주로 추방하고 3남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운다.

 그는 '아비'로서 자식에 대한 연민과 '군주'로서 법도의 단호함을 보여야 하는 깊은 고뇌를 안고 있었다. 장남을 물리고 3남을 후계자로 정하는데 신료들과 왕비 원경황후의 반대가 심했다.

 세자를 폐한 직후 태종은 혼란을 줄이기 위해 즉시 후계자 인선에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많은 고민을 한 모습이 실록에 역력히 나타나 있다. 그는 "나라의 근본은 정하지 않을 수 없고, 정실의 장자를 세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제(양녕대군)의 아들(5세)로서 (후계를) 대신시키고자 한다. 왕세손이라 칭할지, 왕태손이라 부를지 의논하라"고 하교했다.

 이때만 해도 태종은 관례와 전통에 따라 장자와 장손의 순서로 왕위를 물려줄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개국 초기 안정되지 못한 왕권을 어린 세손들에게 맡기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 듯하다. 많은 군신이 양녕대군의 아들을 후계로 삼는 것을 두고 찬반논란을 벌인 가운데 영돈녕부사 유정현은 "일에는 마땅히 지켜야 할 방법과 도리가 있으니,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왕에게 주청했다.

 충녕대군이 후보군에 올랐을 때 원경황후가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혼란의 근본이 된다"며 크게 반대해 잠시 그 뜻을 굽히는 듯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거북점(龜占) 등을 쳐서 결정했다. 당시 신료들의 요청으로 태종은 점을 쳐서 "왕세자를 정할지, 왕세손을 정할지" 결정하겠다고 한 후 숙고를 거듭했다.

 태종의 고민이 여기서 끝났다면 조선의 역사도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종은 관례나 전통보다 조선왕조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실리를 택했다.

 태종이 내린 결론을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태종이 신하들에게 "(신료들이) 의논한 것 중에 점괘를 따르도록 원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이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라의 근본을 정하는 일인데, (점을 치기보다는)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며 충녕대군을 후계자로 정했다.

 후계자로 정해진 그가 우리가 익히 아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세종대왕)이다. 세자로 책봉된 그해 태종이 왕권을 세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세종은 이후 32년간 조선 최고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광주로 떠난 장남의 어려움을 걱정하며 눈시울을 붉혔고 세종도 형 양녕대군에 대한 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역사는 기록했다. 그 후 세종의 장자인 문종이 조선의 5대 임금에 등극한 것이 우리가 배운 조선의 역사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기자의 생명은 현장에 있다' 머니투데이 산업1부 선임기자(국장대우)입니다. 추천도서 John Rawls의 'A Theory of Justice'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