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만 확보한다고 에너지 안보가 보장되는 시대는 끝났다. 중동 전쟁 이후 원유 공급난에 시달렸던 세계가 이제는 경유(디젤)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미국은 프랑스와 독일에 비축 경유 방출을 압박하며 미국산 경유 수출 금지까지 경고했다. 러시아산 경유에 대한 제재도 일시적으로 완화했다. 중국 역시 이달초 석유제품 수출을 일시 중단했다. 총성 없는 에너지 전쟁에서 디젤이 새로운 무기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원유 공급망이 회복된다고 해도 디젤 부족은 해소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동산 원유 수출은 우회 수송 등으로 만회되고 있지만 석유제품 품귀난은 여전하다. 실제 글로벌 석유제품 공급 부족 규모는 하루 약 600만배럴이다. 중동과 러시아 정유시설의 가동 차질에 주요국의 정제능력 축소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원유가 있어도 석유제품으로 바꿀 정제능력이 부족한 셈이다.
유럽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탈탄소와 수익성 악화 등으로 2009년 이후 정유공장 약 100곳 중 30곳을 폐쇄했다. 정제능력도 하루 1750만배럴에서 지난해 1440만배럴로 줄었다. 부족한 석유제품을 수입에 의존한 결과 공급망 취약성이 드러났다. 반면 정제능력을 키운 중국은 자국 내 물량을 확보하면서 수출량까지 조절하고 있다. 정제능력이 에너지 방파제이자 국제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단이 된 상황이다.
한국 정유시설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원유를 사실상 전량 수입하지만 울산·여수(전남)·대산(충남) 등에 세계 최대급 정유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정유 4사는 내수 수요를 웃도는 정제능력으로 지난해 경유만 2억배럴 넘게 수출했다. 자원이 없는 나라가 정제기술과 설비투자로 확보한 경쟁력이다. 글로벌 공급난 속에서도 국내 공급과 수출을 병행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갈수록 다양한 유종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공급망 위기에도 긴요한 석유제품을 생산하는 능력이 진정한 에너지 안보가 되고 있다. 정제능력 확대에 힘써야 하는 이유다. 중동과의 안정적인 거래를 유지하면서도 미국·아프리카·중남미 등 비중동산 원유를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설비투자도 시급하다.
무엇보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최고가격제가 단순한 가격 통제에 그쳐서는 안된다. 정책 시행으로 발생한 손실을 보전해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다음 위기 때 가격 통제만이 아니라 기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유 경쟁력이 따라와야 하기 때문이다. 디젤이, 나아가 정제능력이 무기가 되는 시대를 미리 대비해야 한다.
